정감록에 보면 ‘송도 5백년에 이씨가 나라를 빼앗아 한양에 천도했다. 한양은 4백년에 정씨가 국권을 찬탈하여 계룡산에 도읍한다. 신도는 산천이 풍부하고 조야가 넓고 백성을 다스림에 모두 순하여 8백년 도읍의 땅이다’라고 예언했다.

지금의 계룡 자락에는 비록 수도는 아니지만 계룡대가 들어서 있는 것을 보면 역사적, 풍수지리적으로 보더라도 신령스러운 산임을 알 수 있고, 영적 오묘함에 예전은 말할 것도 없고 지금도 무속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라고 한다.

새학기를 맞이하기 전, 2월 말의 어느 날.

자주 만나는 친구들과 계룡산 등반을 하기로 하였다. 며칠 내내 포근하던 날씨가 하필 꽂샘추위로 기승을 부린다. 차라리 함박눈이라도 내린다면 겨울 산행의 묘미를 느낄 수 있을텐데...

자주 다니는 산행이지만 친구들 중엔 등산의 왕초보도 있어 정도령과 정도령 바위를 볼 수 있는, 그래서 정감록의 내용을 음미할 수 있는 머리봉, 천황봉쪽의 산행을 접고 대신 가장 완만하다는 갑사 - 금잔디고개의 코스를 택하였다. 평상시엔 쉼없이 올라다니던, 그래서 멋없는 코스라 여기던 그 평탄한 길이 오늘은 왜 이리 발길을 잡는지, 전날 새벽녘까지 이어진 모임에서의 과음탓에 흘러내리는 땀을 주체할 수 없다. 친구들 먼저 올려 보내고 쉬다보니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다고 전해지는 자연석의 천진보탑이나 보고 내려갈까?

그런데 갑자기 수정봉이 보고 싶어지는 것이 아닌가. 수정봉은 계룡구선이라 불리는 선인들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갑자기 힘이 솟는다. 하지만 얼어붙은 암벽 틈새 사이로, 그것도 등산로가 아닌 곳으로 올라가려니 생각보다 무척 힘이 든다. 한 길 높이의 암벽을 올라가다가 그만 미끄러져 3m아래의 나뭇가지위로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정신은 말짱한데 왼쪽 발목이 이상하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서 조난당한 것이 틀림없다. 한동안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행히 배낭 속에 파스가 있었다. 발목에 부치고 그냥 누워 버렸다.

계룡 구선(九仙)이 생각난다. 송익필, 이이, 성혼, 조식, 이지함, 서기, 조헌, 고경명, 영규대사. 이들은 생전에 계룡산에서 자주 만났는데, 사후에도 매년 음력 칠월 칠석 전후 사흘간을 계룡산 수정봉(水晶峰)에 모여  걸찍하게들 노닐었다고 전해진다. 이 모임의 좌장은 송익필로 그는 수정봉에서 정신을 수련하여 성도하였고, 단군 이래 면면히 이어 내려온 국선풍류의 도맥을 조선시대에 다시금 꽃피운 사람이라 한다. 특히, 임진왜란에 대비하여 초야에 묻힌 불우한 삶속에서도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는데, 그중 대표적 인물로서 금산전투에서 전몰한 의병장 조헌, 고경명, 영규대사 등 계룡구선 및 이순신 장군과 광해군 때 명장 박엽, 조식의 문인이며 의병장으로 활약한 정인홍, 곽재우, 정기룡, 김덕령 장군 등이 있다.

특기할 것은 구선(九仙) 가운데 율곡과 성혼을 제외한 나머지 인물 모두가 당시 나라에 중용되지 못한 재야인사들이었음에도 평화시에는 조국의 명산대천을 누비며 무리지어 심신을 연마하다가도, 국난극복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였다는 점이다.

또한 아홉 신선들의 면모에서 드러나듯이 이후 오백년간 한국 지성사 내지 정신사에 심대한 발자취와 영향력을 드리운 일단의 위인들이 이 계룡산을 중심으로 심성을 도야하고 서로의 사상적 공감대를 형성해 왔다는 것은 구전의 이야기일지라도 학문적 연구대상으로서의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 하겠다. 즉, 기존의 무속신앙 중심지로서의 계룡산에 대한 일반적 시각에서 벗어나 보다 더 근원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창출해낸 당대의 행동하는 지성들의 산실이자 요람으로서 계룡산의 정신사적 위상을 새롭게 정립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청승맞게도, 봉우리 아래에 혼자 머문 시간이 벌써 1시간은 족히 지난 것 같다. 다리의 통증보다 걱정하고 있을 친구들이 생각난다. 서둘러 약속 장소인 수정식당에 내려오니 먼저 도착한 친구들이 놀려대는 게 아닌가.

 “네팔의 안나푸르나 등정을 하고 왔다는 놈이 금잔디 고개 하나 제대로 넘지 못하냐?”

그래도 오랜 친구들이 좋다.

식당에서의 파전에 동동주 한잔. 그날은 꿀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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