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승희는 미국의 버지니아 공대에서 인문학의 한 분야인 영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가 작년 가을 전공수업의 과제물로 제출했다는 두편의 짤막한 단막극. 그 가운데 <맥비프>는 버지니아 비극의 근본원인을 규명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한다.

 그가 쓴 <맥비프>는 미국대학의 국문과 학생이 의무적으로 읽었을 세익스피어의 대표작들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갖는다. <맥비프>라는 제목은 <맥베스>와 유사한 발음에서 힌트를 얻은 일종의 언어유희적 패러디로 보이며, 또한 희곡의 소재는 <햄릿>의 계부살해 모티브를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맥비프>의 내용은 어떠한가? 그것은 의붓아버지와 의붓아들 사이의 극적 갈등을 형상화한 것이다. 의붓아버지인 리차드 맥비프는 40세의 중년이며, 의붓아들인 존은 13세 소년이다. 존은 리차드가 자기 어머니를 차지하기 위해 친아버지를 죽인 사악한 인물이라고 단정 지으며, 그에 대해 집요한 복수심에 사로잡혀 있다. 존은 관계개선을 바라는 리차드의 호의적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면서, 그의 가벼운 스킨십을 변태성욕자의 음란한 행동으로 몰아간다. 그후 존은 리차드가 자기를 성폭행했다고 모함하여, 흥분한 어머니로 하여금 광기어린 행동을 연출하도록 유도한다. 마지막에 존은 리차드의 목구멍에 시리얼 과자를 쑤셔넣다가 도리어 그로부터 죽음의 일격을 당한다.

 <맥비프>는 이처럼 내용이 단순한 만큼 극중인물의 대사 또한 간단명료하다. 그 대신 드라마의 전 과정을 압도하는 것은 극중인물의 동작들이다. 미국 햄버거의 대명사인 맥도날드와 비프스테이크의 합성어로 추정되는 육욕의 화신. 난폭한 증오의 화신. 광란에 가까운 히스테리의 화신. 그들 세 사람이 보여주는 극중 연기는 전적으로 즉흥적인 바디 랭귀지에 가까운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두 모자가 내뱉는 대사는 쌍방간에 대화의 기능을 상실한 일방적 저주와 욕설이며, 그 뒤를 따르는 것은 시리얼과 접시와 스패너와 파이프를 집어 던지고 전기톱을 휘두르는 폭력적 시위의 연속이다.

 이게 무엇인가? 단적으로 말해 이것은 400년전의 세익스피어가 <햄릿> 속에 공들여 차려놓았던 언어의 성찬을 모조리 제거시킨 한편의 만화극이다. 주인공 햄릿의 인간적 고뇌와 성찰을 묵사발처럼 깔아뭉개는 한편의 액션극이다. <친구>와 같은 조폭영화가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행동의 세계. 그것은 산업화 사회 이후 현대의 시인들을 무수히 단말마의 고통 속으로 몰아넣는 새로운 문명의 공룡이다.

 <맥비프>에 나타난 조승희의 의식세계엔 언어의 세심한 조작을 통한 이성적 사유의 흔적이 존재하지 않는다. 거기엔 오로지 분열된 상투적 사고의 잔재들만이 파편처럼 박혀있을 뿐이다. 그것들은 본질적으로 햄릿적 의미의 <행동의 지연>에 기여하지 못하고, 부비트랩처럼 작렬하는 행동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버지니아 텍의 교정에서 그를 폭력의 광기로 몰아넣은 주범은 바로 그것이었다.

 대량 살상극을 저지르기 전 컴퓨터 카메라 앞에서 운동모자를 돌려쓰고 쌍권총을 겨누던 그의 포즈를 보라. 증오의 대상과 이유가 무엇인지 여전히 확증할 수 없는 요령부득의 선언문을 보라. 그의 포즈는 현실과 가상이 착종된 사이버 세계의 것이며, 그의 선언문은 부조리한 비언어적 행동극의 전형을 이루는 <맥비프>의 것이다.

 버지니아 비극의 원인은 인간의 존재가치를 합리적으로 성찰하는 고전적 인문학의 뿌리를 고사시킨 미국의 포스트 모던적 문화현상에 있으며, 그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 그들에게 자발적으로 예속되어온 우리의 일상적 삶의 자세에 있다. 미국적 실용주의가 일러준 성공의 신화에 도취하여 이미 오래전에 개척의 역사가 끝나버린 처녀지 속으로 부나비처럼 뛰어 들어가는 우리의 눈먼 역사의식에 있다. 저들이 휘두르는 물질주의의 가공할 위력 앞에서 소중한 인문적 가치를 포기한 채, 역설적으로 지극히 비물질적인 가상현실의 환각상태에 빠져드는 우리의 눈먼 현실의식에 있다.

 버지니아의 비극은 미국의 것인 동시에 우리의 것이다. 그가 잔인한 사월의 비바람 속에서 저지른 그토록 끔찍한 비극은 우리가 잠시라도 외면해선 안될 우리의 운명적 자화상 가운데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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