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는 오랜 세월 인간 행복 내지는 세계평화를 기대하면서 정형화 된 교육을 시도해 왔다. 가정, 학교, 동서고금의 격언, 위인들의 전기, 종교 등의 가르침들은 일정부분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의와 염치를 알게 되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등의 기본과 다양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을 편안케하는 방법에는 아직도 서툴다. 남들이 보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일에 매달려 끙끙 앓고 사람과 사람사이에 사소한 일로 틀어지고 평생 동안 등을 지고 살다가 무덤까지 가지고 가는 이들도 많다. 심지어는 부부 부모자식간에도 그런 가슴 아픈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며칠 전 오랜 도반이 찾아왔다. 이 도반(道伴)은 영평사라는 작지 않은 감옥을 만들어 따분하게 사는 필자를 위로하기 위하여 1 ,2년에 한번씩 들려주는 고마운 친구 중의 하나다. 이 친구는 오직 깨달음이라는 대업을 위해 일의일발(一衣一鉢)로 구름처럼 바람처럼 유유자적하는 선객(禪客)이다. 필자같이 불사(佛事) 한다는 착각 속에 한 곳에 묻혀 사는 속물에게는 최고의 귀빈이요 선지식(善知識)이다. 이렇게 훌쩍와서 몇 마디 던지고 떠나는 유유자적하는 멋진 도반들을 만나노라면 나이 육십 줄에도 초심(初心)을 잃지 않은 그들이 부럽기도 하고 아련히 떠오르는 지난날의 추억에 고요한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그들의 배려 이상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며칠 함께 지내면서 중노릇 이야기, 세상 이야기, 주지로서 사람들 만나는 이야기, 운수(雲水)시절의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새는 줄 모른다. 때로는 진지하고 진솔하지만 심각한 것은 없다. 다 받아드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막연히 흘려보내지도 않는다. 한 동이 맑은 백련꽃차가 바닥날 때쯤이면 우리 대화의 주제는 은연중에 ‘중노릇, 잘하고 있는가’로 흘러있다.

또한 세상은 맑아질 수 있을까? 사회 정의는 살아 있는가? 과연 행복이란 무엇이며 세계평화는 가능한가? 등의 주제 넘는 대화도 빠지지 않고 끼어든다.

결론은 ‘지구촌 구성원중의 극히 일부인 인간의 마음에 달렸다’ 이다. 긍정과 배려의 마음은 이웃들을 행복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의 의식을 고양시켜 영혼을 맑힌다. 세상의 시끄러움도 개인의 고통도 긍정과 배려심의 결여라고 단언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요즘 세상이, 아니 세상은 자고로 시끄럽고 불안하여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것이다.

다양한 교육을 받아왔고 하나의 정보를 세계인이 같은 시간대에 접할 수 있는 뉴 미디어 시대라고 하는 이 시대에도 여전히 불안하고 위태로운 것은 무슨 까닭일까? 교육-정보나 지식-이 부족해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너무 편향된 물질적-재산 명예 지위 애욕 등- 욕구가 주범일 듯 하다. 그리고 긍정과 배려의 결여다. 우리의 물적(物的) 마음을 영적(靈的) 마음으로, 부정과 무관심을 긍정과 배려로 방향을 틀어야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지금 자신의 내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게 되고, 옳고 그르고를 떠나 자신의 탓임을 긍정할 수 있게 되고,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된다.

가령 실수를 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자책하는 척한다. 마치 그것이 반성하는 자세인 것처럼. 때로는 자기를 북돋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채찍으로 삼기도 한다. 이 정도는 괜찮은 편이다. 흔히 남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이다.

실수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우선 실수한 자신을 받아드리고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 내가 그랬구나! 잘못된 행위였구나, 그렇게 한 자신을 사실 그대로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이 긍정적인 사고다. 그렇게 실수한 내 자신을 인정하고 지나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내 영혼에게 줄 수 있는 자비의 선물이며 자기 배려다.

그리고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 항상 무엇을 하기 전(대화, 행동, 움직임)에 하나하나 관찰하여 내가 무엇을 하려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일이다. 자신에게 차갑지만 냉정한 질문을 던져보라. 지금 이 행동이, 말들이 정당한가? 공익적(共益的)인가? 라고... 가슴 깊은 곳에서 자신의 참된 양심이 판단해 줄 것이다. 자신의 행위를 진솔하게 긍정하고 다독이는 배려심은 이웃에게로 확산되어 이웃의 실수엔 이해하고 공로엔 박수를 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 사람이 많아질 때 세상은 맑아지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세상은 쉼 없이 불타고 있다. 전산화시스템으로 투명하다 못해 꼼짝달싹도 못하게 좁혀오고 모든 정보는 빠르고 효율적이어서 이보다 더한 편의와 풍요가 없을 것 같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행복해하지 못하고 늘 언짢아 한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언짢은가? 자신과 이웃에게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라. 어떠한 일도 자기로부터임을 자각하라.

‘아! 그렇구나, 그랬겠구나, 얼마나 고충이 컸을까?’ 하고 긍정하고 배려해 보라. 금방 마음에 평화가 찾아올 것이다. 그런 당신에게 고부 갈등이나 부부 불화 따위는 없을 것이다.
삶 가운데 늘 ‘왜 그랬어? 내 알게 뭐야’를 그저 가벼운 마음으로 ‘아? 그랬구나. ‘얼마나 어려울까, 어려웠을까’로 바꿔보라. 행복이 따로 있나, 마음이 편안하면 행복이지. 사회 화합이 멀리 있겠나, 긍정과 배려 속에 피어나는 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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