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생명은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한다.

태초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계속해 온 동물·식물 등 모든 존재들의 이 행복추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정치를 하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먹는 것도, 레포츠를 즐기는 것도, 종교를 가지는 것도 모두 이 행복하기 위한 수단이며 노력이다. 모든 존재의 최대 화두는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는가, 불멸의 행복(永平)이란 무엇이며 그것은 얻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리라.

행복에 관한 한 인간 중생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장 극렬하고 맹렬히 추구한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나머지 가장 추악한 방법까지 동원하여 자신을 불행하게하고 사회를 혼란하게 만들기 일쑤다.

우리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은 크게 나누어 다섯 가지를 얻으면 그런대로 행복하게 느낀다는 오욕락(五慾樂)을 말씀하셨다.

소위 재물욕, 이성욕, 식욕, 수면욕, 명예욕이 그것인데 이것들은 생각만 해도 즐겁고, 얻기 위하여 노력하는 과정에서도 행복하고, 얻을 수 있다는 막연한 기대만 해도 행복감에 젖게 되므로 다섯 가지를 욕구하는 즐거움이라 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중생들은 이 다섯 가지를 골고루 얻었더라도 결코 만족해하지 않고 더 가지려 한다. 왜 그런가? 탐욕은 한량없기에, 원래 그런 것이기에 그렇다.

중생마다 얻어 충족시키고자하는 그것들은 본래 채워지지 않는, 채워질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는데 중생들은 깨닫지 못하고 채우려고만 허둥댄다.

중생의 욕망, 즉 탐욕이 한계가 없기에 오욕락도 채울 수 없는 것인데 그 실상을 아는 자 드물다. 그 탐욕에 의한 즐거움, 즉 행복은 무상한 것이기에 조금 얻었는가하면 곧 없어져 오래 유지되지 않는 것이 오욕락의 속성이기도 하다.

지금 있다가도 잠시 후에는 없어질 수 있는 것들이 재물이나 명예 등등 오욕락인데 그것들이, 내 것만은 영원히 나와 함께 할 줄로 착각하는 것이 사람중생의 어리석음이다. 이 오욕락은 아무리 많이 축적했더라도 진정한 즐거움이 못된다. 오욕을 즐기고 탐닉하다가 패가망신한 사람은 많아도 성공한 사람, 즉 끝까지 그것을 지켜 행복했던 사람은 없다.

다사 오(五)자, 욕구할 욕(慾)자, 즐거울 락(樂)자 인 오욕락(五慾樂)이 다사 오, 욕보일 욕(辱 ), 쓸 고(苦)자 오욕고(五辱苦)가 된다.

이 다섯 가지 욕망들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하게 여겨지지 않아 끝내는 모욕을 당하고서야, 망신을 당하는 고통을 맛보아야 그 욕구를 멈추게 되니 즐거움이나 행복이 아니라 차라리 고통이라 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이것들은 많이 가지고자 하면 할수록 더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이것들에 대한 탐욕, 욕구가 크면 클수록 더욱 모자라니 고통도 더욱 커진다.

탐욕과 고통은 정비례한다. 탐욕이 크면 고통도 커지고, 탐욕이 적어지면 고통도 적어진다. 그러니 중생들이 그토록 가지고자 하는 이 오욕락은 진정한 즐거움, 영원한 행복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잠시 고통은 왜 생기는가를 살펴보자. 탐내고 화내고 삿된 소견을 일으키는 등 세 가지 독한 마음이 원인이다.

삼독심(三毒心)은 왜 생기는가?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심(利己心)이 원인이다. 이기심은 무엇이 원인인가? 나(我), 내 몸이 있다는 착각이 원인이다. 나, 내 몸이라고 착각한 나머지 이기심이 일어나 탐욕하게 되고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니 화를 내게 되고, 탐내고 화를 내어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나만 이롭다면 어떠한 일도 저지르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러 한량없는 고통을 자초한다.

이렇게 자기만 이롭고자 하는 나머지 삼독심을 일으켜 악업만을 쌓게 되고, 악업의 필연으로 태어난 중생에게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근본고통과 애별이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불여의고(不如意苦), 오음성고(五蔭盛苦) 등 끼어드는 네 가지 고통, 즉 팔고(八苦)가 있다.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 태어난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는다. 생겨난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소멸된다. 이 일은 중생 된 자는 누구도 면할 수 없는 철칙이다. 그러므로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을 중생 근본고통이라 하는 것이다. 그 외 네 가지 고통은 잘하면 면할 수도 있는 것들이기에 끼어든 고통이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산다는 것 자체가 온통 고통의 늪이다. 그러니 이 세상을 고해(苦海)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영원히 행복할 수 없는 가?

당연히 행복할 수 있다. 근본고통인 생로병사를 해탈하는 것이 그 최상의 해결책이다. 생사 없는 자리를 증득하면 근본고통은 사라지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헤어지는 고통은 없을 것이며, 미워하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면 껄끄러운 만남은 없을 것이고, 분수없이 얻으려 하지 않으면 다 뜻과 같이 될 것이며, 중생의 몸이 없으면 고뇌는 없을 것이다. 이 여덟 가지 고통을 면하려면 마음을 바꾸지 않으면 불가능 하다. 그러나 마음 바꾸는 일이 말처럼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떻게 무엇을 기준으로 하여 바꿀까?
부처님과 성인의 가르침에 의지할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놓아버리라 하셨고, 공자님은 적은 욕심으로 만족할줄 알라 하셨고,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자가 행복하다 하셨다.

굳이 따지지 않는다면 같은 의미의 가르침이다. 그러면 재색식수명이 없는 자가 행복한가? 있는 자가 반드시 행복한가? 아니면 아무것도 없는 자가 반드시 행복한가? 그렇지 않다. 없는 자는 가지고자 하는 고통이 있고 가진 자는 더 가지고 싶고, 이미 쌓아놓은 것을 잃지나 않을까 염려하는 고통이 있다.

행복은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에 있지 않다. 자신의 의식 여하에, 가치관 여하에 따라 행, 불행이 결정 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의식의 대 전환이 필요하다. 가치관의 재설정이 필요하다. 우선 중생 욕망은 채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커져서 아무리 채우려 해도 채울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음을 파악해야 한다.
그러면 성인들의 가르침을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세상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버려라, 비워라, 놓아버려라 하신 말씀을 소개하면 고개를 끄떡이다가 수행하시는 스님들이라면 모르되 세속에서야 다 버리면 어떻게 사느냐고 반문하고 항의 한다. 그러면 나는 묻지 말고 버려보라, 비워보라, 놓아보고 말하라 한다. 물을 마셔보지 않고 어찌 그 물맛을 알겠는가? 포기하라는 말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석가의 ‘지족제일부’(知足第一富), 예수의 ‘천국의 땅은 마음이 가난한자의 것’, 공자의 ‘작은 욕심으로 만족할줄 알라’는 가르침은 같은 의미일 것이다. 역시 탐욕을 경계한 말씀이다. 이런 따위의 말을 하면 무슨 정신 나간 소리냐, 구석기시대냐며 함께 어울리지도 않으려는 세상이다.

그런데 요즘 세간에 참 행복의 기운이 보이는 듯하여 흐뭇하다. 연말에 있을 대선 후보 경선에서 석패를 한 박근혜 전대표의 깨끗한 승복이 그렇고, 침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내는 국민정서가 그렇다.

사람들은 이런걸 기대한다. 소박한 꿈을 먹는다. 아직은 순리를 사랑한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은 평화롭다.
청빈(淸貧)한 부(富)를 동경하는 인류는 아직 희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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