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산수유부터 시작된다. 개울 건너 대밭집 죽순 사이로 팽팽하게 터지던 그 샛노란 봄소식을 오래도록 김유정 소설의 노란 동백꽃인 줄 알았었다.

그 다음도 또 노란 빛깔 개나리다. 바다로 가던 길목 언덕배기 초가집 울타리로 치렁치렁 늘어져 있었다.

나무꾼네 옴팡집 감나무 가쟁이 타고 봄물이 물씬물씬 오를 즈음, 목련 벙글고 벚꽃이 뽀송뽀송 가슴 터뜨리기 직전에, 낭창낭창 허리 흔들던 개나리꽃 그 빛깔이 하늘로 스며들었던가.


그 사이에 냉이꽃이다. 겨우내 꽁꽁 언 땅 속에서 움츠리던 씨앗들이 느닷없이 잔설 헤치고 새순을 내미는 것이다. 논두렁이나 산기슭 더러는 아파트 텃밭에서 아낙들이 바쁜 틈새에 칼질을 하고 있어서 덩달아 마음이 초조해졌다. ‘일을 해야지’ 그러나 굳은 어깨가 펴지지 않아 망설이다가 연한 순이 억세어질 즈음 냉이는 순식간에 하얗게 밥풀떼기 꽃을 피운다. 그렇게 이른 봄과 작별을 나누는 것이다.

이번에는 민들레다. 눈에 다래끼 난 내 아들이 울면서 가리키던 앉은뱅이 노란 꽃이다. 권정생의 강아지똥을 먹고 자라난 별조각이다. 바스콘셀로스의 오렌지 나무 아래 펼쳐졌던 그 민들레다. 꽁무니로 뭉게구름 터뜨리는 모기차 좇다가 발목 부러진 그 동심이 목발을 깔고 주저앉던 그 자리다.

봄 햇살이 연신 부은 발등 싸매는데 눈다래끼 아이는 민들레 옆으로 터진 개미구멍에 빠져 숨소리도 죽인다. 긴 행렬로 늘어선 채 부지런히 먹이를 나르는 개미떼는 낱낱이 검은 입자다.

이번에는 그 생명의 봄이 진달래를 피워낸다. 빨갛다. 이 산 저 산, 잔설이 잦아진 자리마다 영락없이 진달래 붉은 봉오리가 봄 햇살을 기다리고 있다. 정신없이 꺾어서 꽃병에 꽂거나 더러는 입 속에 들어가서 봄날의 공복을 채워주기도 했다. 그래도 진달래는 아주 원색적이지는 않아서 언제나 지척에 자리잡는다. 먹을 수도 있고 끌안을 수도 있었다. 곧바로 뒤를 잇는 철쭉은 그 빛깔이 너무 진해 가까이 가기 힘들다. 더러는 진달래처럼 입 속에서 넣었다가 그 독소를 못이긴 채 복통으로 쓰러지기도 했다. 

봄이다. 제주도 4.3항쟁 60주년에 다녀오기도 했던 그 봄이다. 바람과 돌과 여인네 숨소리가 진한 그 섬이다. 진혼곡에 흐느끼고 시낭송에 어깨를 들먹이는 섬나라 골짜기로도 진달래 새순들이 멍울을 피워 올리는 중이었다. 아, 어디선가 몸에 배었던 풍경이다. 그해 이른 봄, 화약 연기처럼 세상을 떠난 수만 민초들의 넋을 떠올리면 종달새들도 안쓰러워 지저귀지 못한다. 눈시울이 뜨겁다. 햇살도 함부로 감싸지 못하고 뭉게구름도 비켜지나간다. 보수 강단에겐 영원히 ‘머나 먼 당신’이겠지만 우리들은 사월만 떠올리면 죄스러움으로 가슴이 미어진다.   

   그랬다. 이제는 잔영조차 아스라해진 군홧발 시국에 그런 아픈 풍경들이 있었다. 숙취로 버걱대던 몸이 신새벽 초인종소리와 함께 끌려가던 그 젊음의 막바지다. 某관료는 나에게 진달래를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서웠다. 당신네들은 옷차림도 빨간 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아니다. 아니라고 부인했다. 이제 그 두려운 질문들이 새롭게 오버랩된다. 기십 년 세월이 지난 이후 월드컵 응원단 붉은 악마의 함성을 보면 만감이 교차한다. 붉은 티셔츠에 자신 있게 ‘악마’를 내세우는 젊은 무리들의 용틀임이라니.  그래서 글을 쉬고 싶었다. 한 때 문학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고 실제로 긴 세월 매진했었다.

글이 곧바로 밥이요, 명예요, 권력이요, 삶의 마침표인 줄 알았다. 글을 쓰면 경직된 세상의 간극을 메꾸는 점액질들이 콸콸 쏟아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약진은 ‘진보의 붓’과 동행을 거부했다. 때때로 발목 잡는 재미로 활자판에 등장하는 딱한 무리들도 있었다. 논리적으로 설득할 가치가 없을 땐 어쩔 수없이 평행선으로 가야 한다. 아프다.   

아프니까 다시 손을 내밀어야 하는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그네들에게도 다순 국밥과 희망의 의미를 나누어야 할지도 모른다. 물질화 ? 문서화된 자본주의 세상에서 아직도 캐내야 할 이름자가 존재함을 가르쳐야 한다.  울면서 뿌린 씨앗 웃으며 거둔 기억은 없지만 그래서 믿음으로 끌안았던 기억은 샘물처럼 아름답다. 봄이다. 마른 살비듬이 부스스 쏟아지는 그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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