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로부터 옷은 그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

양반인지 상놈인지 백정인지 또는 그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심지어는 종교가 무엇인지 옷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지금은 신분에 관계없이 옷을 입지만 그래도 그 사람이 입는 옷으로 어떤 사람인지 대충 알 수 있다. 그래서 각 나라에서 끊임없이 패션쇼가 열리고 여성들은 아름다운 옷을 입기 위해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러나 올해에 유행할 옷이 무엇인지 전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는 나라의 여성들이 있다. 바로 이슬람권 여성들이다.


그들은 ‘히자브’를 쓰고 다니거나 몸엔 ‘차도르’를 두르고 다닌다. 그들 나름대로는 좋은 천으로 만든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 또 모양이 조금씩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다 똑 같아 보인다.

그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옷을 멋있게 입고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싶은 것은 어쩌면 여성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특히 여자는 옷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아랍권 여성들은 얼굴만 내어 놓은 채 한 창 물오를 아름다운 육체는 검은 천으로 다 가리고 다니는 것이다.

아프가니스탄 같은 곳에서는 아예 눈만 내 놓은 채 몸 전체를 다 가리는 ‘부르카’를 쓰고 다닌다. 그러니 같은 여성으로서 참 안 됐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지도 모른다.

세계여성 인권위원회에서는 이것은 여성의 인권 탄압이니 뭐니 해서 말들도 많았다. 그래서 터키나 요르단 이집트 같은 일부 아랍권에서는 ‘히자브’를 쓰는 것을 금지하기도 하고 개인의 자유에 맡기기도 한다.
그러나, 정책적으로는 그렇게 하여도 관습이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어서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들에게 ‘히자브’나 ‘차도르’를 쓰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내가 그 나라에 태어나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마음이 울적하다거나 기분 전환을 하고 싶을 때 옷장의 옷을 꺼내 요리 조리 입어보며 코디를 해 보는 것도 여성에게는 즐거움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차도르에 대하여 말한 이슬람교도의 한 여성의 글을 읽기 전에는 그랬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차도르를 착용하면서부터 나는 내 몸이 완전히 내 것이 됨을 느꼈다. 이제야 나는 다른 남성들이 내 육체가 아닌 내 내면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그로인해 나를 존중하고 함께 의견을 교환하고 있음을 느낀다. 눈에 보이는 육체가 너무나 많은 것들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도 이제야 알았다.”

그들의 옷이 그들을 구속하고 있으리라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물론 이슬람권의 여성들이 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들은 차도르 속에서 맘껏 자유를 누리면서 남녀가 서로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날씨가 더워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거리에 나가면 배꼽을 예사로 내어놓고 다니거나 바지를 엉덩이에 걸치고 다니는 여자들을 많이 본다. 드러내 보이고 싶은 욕망이 유행을 하는 것이다. 빠른 정보시대에 자신을 빨리 내 보여야 하는 경제이치가 작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차도르 속에 갇혀 내면의 아름다움을 천천히 가꾸는 이 여성이 잔잔한 울림이 된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외면에 있지 아니하다는 지극히 상투적인 말도 떠 오른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