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교환교수로 갔을 때의 일이다. 내가 갔던 조지아대학교는 미국 동남부에 있는 조지아주의 수도인 애틀란타에서 고속도로로 약 한 시간쯤 떨어져 있는 에덴스라는 작은 도시에 있었다.

처음 미국 살림을 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대학에 가서 여러 가지 수속하랴, 연구실 정리하랴, 출근길 익히랴, 자동차 운전면허 따랴, 생필품 준비하랴, 하루 해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노후한 아파트가 문제였다. 2층 욕조의 수도꼭지 고장으로 뜨거운 물이 끝도 없이 쏟아졌다.

우리나라처럼 아파트가 20층 30층에 경비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곳은 땅이 넓어서 그런지 2층으로 주택처럼 띄엄띄엄 지어서 한 마을이 한 울타리로 한 아파트였다.

쏟아지는 물을 아무리 막아도 안 되고, 우리처럼 수도 계량기의 잠금장치도 없었다. 마침 토요일 밤이라 아파트 초엽에 있는 사무실은 직원들이 퇴근한 지 이미 오래였다.

아파트 등록서류를 찾아서 책임자에게 서툰 영어로 다급하게 도움을 청했다. 그분은 대수롭지 않게 월요일에 고쳐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밤이 깊어도 그치지 않는 물을 보며, 무엇보다 이 많은 수돗물 값도 걱정이 되고 해서 다시 전화를 걸었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집이 무너질 정도로 위급한 상황이 아니면 월요일 보자며, 피곤한 듯이 먼저 전화를 끊어버렸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몰랐다. 아내와 아들 세 식구가 번갈아 가며 목욕을 해도 물은 그치지 않다가 밤 12시쯤 되니 저절로 물이 멎었다.

월요일 아침, 아파트 직원들이 출근하는 이른 아침에 사무실로 달려갔다. 물값을 절대 낼 수 없다고 단단히 따지고 항의할 참이었다. 사무실에는 백인여자와 흑인여자 사무원과 남자 직원인 듯한 사람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새로 입주한 낯선 동양사람인 나를 보고 모두 일어나서 반갑게 아침인사를 하며, 의자를 권하고 커피와 간단한 과자 등을 정성껏 대접하는 것이다. 나도 얼떨결에 아침인사를 하며 그들과 서툰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에게 심한 말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무엇보다 말이 서툴러서 항의도 못하고, 오히려 미식축구 이야기, 아파트의 수영장이나 테니스코트가 좋다는 이야기만 나누다가 즐겁게 나오고 말았다. 말을 못하니까 싸움은 그만두고 항의도 하기 어려웠다.

뒤에 안 일이지만, 그곳은 수도세를 따로 내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그때 말을 못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흔히 우리들의 생각이 말을 통해 표현된다고 한다. 그러나 때로는 말이 엄청난 힘으로 생각을 지배하기도 한다. 말 한 마디가 큰 재앙을 막기도 하고, 때로는 잘못된 말 한 마디 때문에 한 사람의 앞길을 망치게도 한다.

유고의 작은 시골 마을 천주교회 주일 미사를 준비하기 위해서 신부를 돕던 두 소년이 실수하여 제단의 성찬으로 사용할 포도주병을 깨뜨리고 말았다. 소년들은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신부는 한 소년의 뺨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어서 물러가라. 다시는 제단 앞에 오지 마라!”

마침 한 소년은 포도주를 닦은 걸레를 치우기 위해 밖으로 나갔었기 때문에 조금 늦게 돌아왔다고 한다. 먼저 소년을 너무 심하게 야단친 일이 부담이 되었던 신부는 늦게 온 아이도 미웠지만, 억지로 이해와 동정어린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조용히 속삭여 주었다고 한다.

“더 잘 준비하려다가 실수를 했구나, 그래, 넌 앞으로 훌륭한 신부가 되겠구나.”
정말 이 신부의 이야기대로 야단맞은 소년은 마음에 깊은 상처를 가지고 천주교회를 떠나 공산주의 운동에 앞장서서 훗날 유고의 티토 대통령이 되었고, 칭찬 받은 소년은 자라서 유명한 훌톤쉰 대주교가 되었다고 한다.

같은 감정을 가지고 말만 다르게 했는데,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독이 되기도 하고 보약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때로는 말이 사람의 감정을 조정하는 무서운 힘이 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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