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공주 지역사 公州 地域史 첫 번째 이야기

특정한 문화는 그렇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어떤 배경이 있다는 인류학자 레비-스트로스(Claude Levi Strauss)의 말이 있다. 그렇다면 공주지역문화의 배경은 무엇일까? 잘 알려져 있듯 공주를 만들어온 배경에 ‘역사’가 차지하는 입지, 위상은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공주의 역사와 관련된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반갑고, 숨겨진 역사를 찾아내는 일은 고고학자가 땅속 유물을 찾아내는 것처럼 기대 되기 마련이다. 필자는 공주가 역사도시로 형성되었던 배경 중 ‘인물’을 주목한다. 공주에 영향을 주고 받은 인물이야말로, 공주를 만들어온 주인공들이자 현재 공주의 정체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앞으로 인물과 공주지역사라는 본 칼럼을 통해 ‘공주역사인물’을 소개할 것이다. 그러나 인물 자체의 생애나 사상 등에 집중하던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공주와 인물이 어떠한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인지에 보다 집중할 것이다. 또한 그동안 제대로 관심 받지 못했던 인물들 뿐 아니라 관련 자료들, 유적, 유물, 지명, 설화 등을 폭넓게 소개하며 인물하나로 공주 지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보탬이 되고자 한다. 그 첫 번째로 공주를 효의 고장으로 만들어준 신라시대 인물 ‘향덕’과 그에 대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이다.

삼국사기의 효자‘ 향덕’& 삼국유사의 승려 ‘신효’

우리나라 최고(最古) 역사서인 '삼국사기'에 첫 번째로 등장하는 효자 ‘향덕’ 은 웅천주(공주의 통일신라시대이름) 의 사람이다. 이때부터 공주는 역사와 전통(효)이 흐르는 문화도시가 될 징조가 보였던 것일까? 삼국사기가 전하는 향덕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향덕(向德)은 웅천주(熊川州)의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아버지 이름은 선(善)이고 자는 반길(潘吉)이었는데 천성이 온후하고 착해서 마을에서 그 행실을 칭찬하였으며, 어머니는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향덕 또한 효성스럽고 순하기로 당시에 소문이 났다. 천보(天寶) 14년 을미(755)에 흉년이 들어 백성이 굶주리고 더구나 전염병이 돌았다. 부모가 굶주리고 병이 났으며 ...(중략)....봉양할 것이 없어 이에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떼어내어 먹게 하여..(중략) 완쾌시켰다. 고을의 관청에서 주(州)에 보고하고 주에서 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을 내려 조(租) 300섬과 집 한 채, 구분전(口分田) 약간을 내려주고, 담당 관청에 명해 비석을 세워 일을 기록하게 하여 드러내도록 하니 지금까지(고려) 사람들은 그곳을 효가리(孝家里)라고 불렀음을 전하고 있다.

소학동 향덕 비석과 비각 모습(좌), 삼강행실도 향덕 효행 내용과 그림(우)
소학동 향덕 비석과 비각 모습(좌), 삼강행실도 향덕 효행 내용과 그림(우)

효자 향덕의 설화에서 우리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향덕은 통일신라시대 경덕왕(742~765) 대의 웅천주(공주의 옛 지명)인물이란 점, 어머니의 병을 낫기 위해 허벅지 살을 발라내는 효행 모습(할고공친 설화), 향덕의 효행으로 지어진 마을 이름이 효가리라는 것이다. 1265년 전 향덕의 설화는 역사적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실체가 곳곳에 현존하고 있다. 공주 소학동에는 효자 향덕비의 구비, 신비가 있고 비석은 충청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어 비각 안에 보존되고 있다. 주변에는 향덕이 허벅지를 벨 때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는 ‘혈흔천’도 여전히 지방하천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설화는 삼국사기(1145년) 뿐 아니라 약 130여년 뒤 편찬된 삼국유사(1281년),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각종 지리지, 삼강행실도 등에도 등장하며 ‘향덕‘은 우리나라 대표 효자로 자리매김해 온 것이다. 여기까지가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향덕 이야기다. 그렇다면 이제부터 향덕과 관련된 새로운 인물을 소개해 볼까 한다. 잠시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전설로 눈을 돌려보자. 

신효(信孝)는 충청남도 공주 출신으로 신라 때의 승려이다. 신효는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의 어머니는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매일 고기를 구하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중 길에서 학 다섯 마리를 만나 활을 쏘았더니 그중 한 마리가 날개깃 하나를 떨어뜨리고 모두 날아가 버렸다. 신효가 그 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상하게 여긴 그는 고기를 구하는 것을 포기하고는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를 대접했다.
이후 신효는 깨달은 바가 있어 승려가 되었는데 자신이 살던 집을 절로 만들어 효가원(孝家院)이라 하였다. 그는 길을 떠나 전국을 여행하였다. 경주 경계 하솔(河率, 옛 강릉지역, 이후에 명주로 개명)에 이르러 학의 깃으로 사람들을 보니 모두 사람의 형상으로 보였다. 그는 늙은 아낙네로 변신한 관음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자장법사가 집을 지어 머물렀던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어느 날 다섯 명의 승려가 신효를 찾아와 말하기를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고 하였다. 신효가 영문을 몰라 하자 승려들이 또한 말하였다. “그대가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신효가 학의 깃을 승려들에게 건내니 가사의 찢어진 곳에 대었는데 꼭 맞았다. 학의 깃털이 아니고 베였던 것이다. 신효는 작별한 후에야 비로소 그들이 다섯 성중의 화신임을 알았다.

신효가 살던 곳은 오늘날의 오대산 월정사(月精寺)를 일컫는다. 이 월정사에는 신효 이후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信義)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으며 뒤에 또 수다사(水多寺)의 장로 유연(有緣)이 살았는데 이로부터 점차 큰 절을 이루었다고 한다.

위 기록은 『삼국유사(三國遺事)』 「탑상(塔像)」편 ‘오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로서 ‘신효’라는 인물을 소개하고 있다. (신효는 이후 많은 기록에서 신효거사信孝居士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후 글에서는 신효거사라 표기하겠다.) 그런데 위 내용을 보면 공주출신, 신라시대, 넓적다리(허벅지)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드린 효행, 효가원 등의 몇 가지 사실이 앞 선 향덕 설화의 핵심적 부분과 매우 닮아 있다. 승려가 효행을 한 독특한 이 내용은 현재 다양하고 읽기 쉽게 각색, 콘텐츠화 되어 있는 것을 여러 매체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털로 눈을 가린 신효거사(출처 :재미있게 다시 쓴 이야기 삼국유사, 2013, 엔블록), 신효거사가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리고 출가 월정사가 될 곳에 머무른 이야기 포함(출처: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 2016, 서해문집)
털로 눈을 가린 신효거사(출처 :재미있게 다시 쓴 이야기 삼국유사, 2013, 엔블록), 신효거사가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께 드리고 출가 월정사가 될 곳에 머무른 이야기 포함(출처: 청소년을 위한 삼국유사, 2016, 서해문집)

그렇다면 위 기록을 단서로 신효거사란 인물을 좀 더 알아보자. 신효거사 이야기에는 향덕 전설과 비슷하지만 새로운 내용이 등장한다. 어머니에게 드릴 고기를 얻으려다 길에서 5마리의 학을 만나 활을 쏘았지만 깃털만 떨어지고 잡지 못했다. 그러나 깃털로 세상을 보니 모두 고기로 보여,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이를 불교식으로 보자면 사람이 업보로 인해 현생에서 동물로 태어날 수 있고, 전생에 동물이었을지 모르니 자신의 허벅지살을 베어냈다고 해석되기도 한다.) 후에 자신의 집을 불교식이면서 효를 숭앙하는 사원 효가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공주를 떠나 옛 강릉 지역인 하솔까지 이동하였고, 여기서 만난 노부인에게 힌트를 얻어 오대산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이다. 신효거사는 출가 후, 경주를 거쳐, 오대산에 이르렀으며 월정사에 머물렀던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신효는 한국 불교계에서 매우 중요한 입지를 가진 인물지만, 오히려 효행 기록이 더욱 강조된 행적 때문에 여러 불교연구자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또 이후 어떤 역사서에서도 신효거사의 이야기가 불교중심으로 변형되거나 수정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신효거사는 미스테리한 인물이라 한다.(염중섭, 2020)     

 향덕, 출가하여 승려가 되다?

그렇다면 ‘향덕, 신효거사’는 어떤 관계이고 왜 비슷한 이야기가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일까? 그동안 이상하리만치 이 둘에 대해 큰 관심이 없었다. 일부이지만 불교 미술계에서 신효거사와 향덕을 동일 인물로 보는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고(강병희) 최근에는 역사학계에서도 그 의견에 동의하고 있다.(차광호 2018/윤용혁 2020). 즉, 향덕이 출가하여 신효거사가 되었을 설정도 가능한 것이다. 공주에 거주했으며, 효행의 방법 또한 매우 흡사한데다가 현재까지도 전해지는 효가리, 효가원에 대해 일치하는 기록은 누가 봐도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로 파악될 여지가 있다. 이야기의 구조상 신효거사가 효행 이후 승려로 출가한다는 것만 다르다. 이름에서도 성격을 엿 볼 수 있는데, 향덕은 덕이 강조된 유교식, 신효거사는 ‘효를 믿는 거사’ 승려로서 불교적 성격이 더해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중요한 것은 효인 것이다. 향덕이 승려가 된 사실이 이제와 ‘뭣이 중요한가’ 이야기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공주를 역사적 맥락에서 주목하면서 향덕→신효거사를 바라보면 조금 다른 이야기와 해석도 가능하다. 향덕의 효행만으로는 가려진 공주 이야기가 너무 많다.
우선 그들이 살았던 통일신라시대 변화상 속에서 그 둘을 놓고 볼 필요가 있다. 신라 중대 유교 전파를 위한 다양한 제도는 뿌리 깊은 불교계의 반대 속에서 진행 되었다. 불교계는 중, 하대에 이르자 유교식 ‘효’와 불교의 ‘수도’가 조화하는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갔다. 그래서 신라 말이 되면 유불교가 혼합된 삶이 사회전반에 더욱 확산 되었는데 예를 들어 헌강왕(875~886)은 상복을 입고 조상을 받드는 효행과 함께 불도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므로 신라시대 유교식 사회건설을 위해 선택된 이가 향덕이고, 이후 신효로 새로운 삶을 살아갔다면  향덕은 유불교 조화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현재까지도 유불교가 혼합된 한국사람들의 삶을 본다면 향덕의 의미와 가치는 비단 허벅지살을 발라내는 가혹한 효행만 강조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좀 구체화된 내용이 있다. 신효거사의 행적을 보아 무열왕 계의 유불교 조화 정책과 동일한 사상적 면모로 해석되며 이는 웅진에 있던 무열왕계의 연고와 관련 지어진다는 것이다.(강병희, 1995:2008) 즉, 원성왕의 즉위로 명주지역(하솔, 강릉)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던 무열왕계 김주원이 복귀를 도모하고자 옛 백제 땅에 있던 신효거사와 함께 월정사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 조성을 꿈꾸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월정사 8각 9층 석탑이 이러한 배경에서 신효거사를 중심으로 조성됐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제기한다. 신효가 언제 공주를 떠났는지는 불명확하지만, 우리지역에서 있었던 통일신라시대 유의미한 사건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822년 김주원의 아들인 김헌창이 웅천주 도독으로 좌천되자 공주에서 난을 일으켰던 사건이다. 이처럼 향덕, 신효거사 스토리는 한국사의 흐름 속에서 작은 파편처럼 흩어져 있다. 하지만 언젠가 그 파편이 뚜렷한 윤곽을 드러내는 날, 우리는 공주지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혈흔천이 흐르는 소학동 일대를 주목하자

자 그렇다면 이제 현실로 돌아와 향덕과 신효거사 스토리의 지역적 배경인 ‘효가리’, 그리고 현재 소학동에 주목해보고자 한다. 이미 향덕 비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는 만큼 여기서는 두 인물과 관련된 지명 ‘효가리’를 중심으로 흔적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다.

삼국유사 이후 효가리는 조선시대 기록에서 다수 확인 된다. 15세기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 조에는 ‘효가리원(孝家里院) : 주 동쪽 10리에 있다. 정추(鄭樞)의 시에 “단풍잎 몰아치고 원(院)마을 비었는데 산 잎에 선 옛 비석에 석양이 붉었네. 넓적다리 살 베인 효자 지금 어디 있느냐...(중략),,,효가원이 어디 메인가 희멀건 빛 속으로 내 날아 없어지네” 라고 전한다. 이외에도 조선시대 인물인 유희춘, 조익의 기록에서 효가리를 발견할 수 있다.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의  『미암집(眉巖集)』 1565년 기록에는 “5월 29일에 30리를 갔는데 공주(公州) 효가원리(孝家院里)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하여 효가원이 역원으로 변모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공주에 유배 왔던 인연이 있는 가휴 조익(1556~1613)이 남긴  『진사일기』(1592년부터 1593년까지 임진왜란 시기에 의병활동을 기록한 일기)에는 선여(善餘:蔡宗吉)를 시켜 효가리(孝家里) 오대붕(吳大鵬)의 집에 있는 군량 10석을 가져오게 하였다.라고 하여 16세기 말까지도 효가리, 효가리원의 존재를 확인 가능하다. 마을의 규모도 적지 않았는데, 18세기 지리지인 여지도서에 따르면 효가리는 공주목에서 익귀곡면 현암리 다음으로 사람이 많이 거주하였던 곳이다.(204호 거주, 남자 279명, 여자 205명),  한편, 한국지명총람에서 소학동 일대 흥미로운 지명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 소학리(巢鶴里) (소학섬, 소학도) : 본래 공주군 동부면 지역으로서 북쪽에는 금강이 있고, 서쪽에는 혈류천(血流川), 동쪽에는 왕촌천(旺村川)이 있어서 지형이 마치 섬같이 되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세교리, 포변리, 향효포, 막동, 와야리, 월성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소학리라 함.
 - 향효포(向孝浦) :  소학섬 서쪽에 있는 마을. 신라 때 효자 향덕이 살았던 효포를 향모(向慕)라 함. 길이 높은 산 기슭에 있으므로 높은 행길이라고 함.
○ 신기리(新基里) : 본래 공주군 동부면 지역으로서 효가원 동남쪽에 새로 된 마을.
- 선절(선사):텃골 서남쪽에 있는 작은 마을, 옛날에 절이 있었다고 함.
- 시묘산골 : 욧골 뒤에 있는 골짜기. 효자 회덕(향덕의 오기인 듯)이 이곳에 부모의 산소를 모시고 3년 시묘를 살았다고 함.
- 텃골 : 효포 남쪽 응달쪽에 있는 마을. 이조 때 효가리원이 있었음.
- 효포 : 신기리에서 가장 큰 마을, 효자 향덕비가 있고, 효포 초등학교가 있음.
○ 화은리 : 본래 공주군 익구곡면의 지역.
 - 거사원(居士院) : 화은 서쪽에 있는 마을(구체적 유래가 적혀 있지 않음)

 
위는 혈흔천을 따라 이어진 마을 소학동, 신기리, 화은리의 지명 일부를 정리한 것이다. 물론 모든 지명을 다 소개한 것은 아니지만 소학리와 신기리 일대의 지명은 대부분 향덕과 신효거사와 맞닿아 있다. 예를 들어 신효거사 이야기에 등장하는 <학과 소학동(巢鶴)의 관련성>, <시묘산골-회덕의 시묘살이> <향효포-높은행길, 향덕이 살았던 곳> <텃골-효가리원이 있던 곳> <거사원 - 신효거사와 연결성> 등 이다. 어쩌면 향덕 부모의 산소가 있다는 시묘산은 욧골 뒤 골짜기 어딘가에 잊혀 졌을 가능성도 높다. 따라서 현재 향덕 비가 있고 향덕이 살았다는 향효포(높은 행길) 즉 소학동 이외, 당대 향덕의 무대가 되었던 소학동, 신기리, 더 넓게는 혈흔천을 중심으로 화은리까지 그 일대 전체를 주목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 더 주목할 것이 있다. 효가원 동남쪽 신기리의 절터이다. 실제 1963년 공주 신기리 능엄사지에서 백제시대 부처 금동여래입상이, 소학동에서는 고려시대 불상이 출토된 사실이 있다.(유물들은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서 소장, 전시하고 있다.) 게다가 신기동에는 백제시대 고분군이 발견되었는데 그렇다면 백제 사찰과 고분군, 통일신라 최초 효자 향덕과 비석, 신효거사의 출가와 효가원, 고려 사찰, 조선시대 역원과 공주에서 2번째로 큰 마을 등 이 중요한 퍼즐들은 공주에 어떻게 맞추고 사용될 것인가. 우선 필자는 삼국시대부터 줄곧 이 일대가 주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향덕의 효행, 출가와 효가원, 경주로 유람, 월정사의 중창 등 이 역사적 이야기가 펼쳐지는 데는 물론 우리가 잘 모르는 매우 복잡다단한 배경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비단 향덕의 비석과 그의 효행의 내용만을 볼 것이 아니라 큰 틀에서 한번 쯤은 인물과 관련된 역사적 배경, 지역적 요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학동일대의 지도와 그 일대에서 출토된 불상
소학동일대의 지도와 그 일대에서 출토된 불상

더 풍부한 스토리로 무장, 한국 대표인물 ‘향덕’을 기대한다.

필자가 이 이야기를 준비한 계기는 박사논문(2018년 『공주역사인물자원의 기록, 보존, 활용 연구』)을 준비하면서 시작되었다. 우연하게 경주의 <신라를 빛낸 인물관> ‘신라의 효행’ 코너에 향덕이 전시된 것을 보았다. 순간 왜 향덕이 여기있지?라는 의문을 품었다. 그리고 얼마 후 한국 콘텐츠 진흥원에 소개된 ‘신효거사의 효행’을 읽었는데 누구나 알기 쉽게 삼국유사 기록 속 내용이 콘텐츠화 되어 있었다. 그런데 향덕의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 내용만이 나열 되 있음에 안타까움이 들었다. 물론 경주는 신라의 인물로 향덕을 소개했지만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경주의 인물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신효거사 보다 덜 알려진 향덕을 보면서 과연 진짜를 가진 공주에서 향덕에 대해 얼마나 알고, 알리고 있는가 되돌아 봤다. 그동안 향덕을 잘 알면서도 전혀 모르고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더 많은 자료로 향덕을 다시 보니 그 역사적 배경은 더 심오하고, 공주 지역의 특수함까지 엿볼 수 있었다. 공주지역 입장에서 본다면 향덕은 이미 삼국사기가 인정한 인물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좀 더 본질적으로 지역사적 입장에서 향덕의 의미와 가치를 검토해보면서 신효거사라는 인물까지 끌어안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더 많은 실체가 연구되어야 하겠지만, 지금까지 정작 향덕은 왠지 효행으로만 강조된 공주사람들만 아는 인물로 국한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에 아쉬웠다. 따라서 향덕의 비석만이 덩그라니 보존하기 보다 역사적 정황과 관련된 인물과의 관련성, 가능성까지 모두 포용하고 유적 이외 관련된 인물, 유물, 지명, 설화 등등을 철저하게 정리하여 풍부한 스토리로 무장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향덕의 효행을 바탕으로 다양한 효 콘텐츠 개발에 기대를 걸어볼 수 있고, 최근 추진되는 충청유교문화권 사업 등에 공주가 유교문화의 ‘본 本’ 으로서 더 선두에 나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공주의 정체성을 선물한 인물이자 곧 한국 전통문화를 대표하는 인물로 향덕의 위상이 높아져야 함은 당연하다. 그래서 언젠가는 ‘향덕과 신효거사’ ‘한국 최초의 효자, 공주인 향덕’ 등 더 풍부한 인문콘텐츠로 공주의 인물이 검색되고 혈흔천이 흐르는 소학동 일대가 효의 콘텐츠로 활용가치가 높아질 날도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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