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 9

공주학아카이브 구축을 위해 필자는 개인의 자료 뿐 아니라 공주 주요 관공서 기관들의 자료들도 꾸준히 수집해 오고 있다. 공주의 우체국, 법원, 교도소, 경찰서 등 각 공공기관으로부터 수집한 사진이나 문서들은 그곳의 기능과 역사를 알 수 있게 하고, 아울러 충남 행정의 수부지로서 옛 공주의 면면의 모습들을 상상할 수 있게 만들었다.

올해 마지막으로 수집한 공주의 공공기관 자료는 공주소방서였다. 관공서이니만큼 구성원들이 자주 바뀌면서 과거의 옛 자료가 지금까지 남아있거나 관리되고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소방서의 자료수집을 하다가 필자는 소방서의 역사와 숨은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자, 그럼 이제 공주의 화재를 진압해 온 공주소방서의 옛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2005년 마곡사에서 열린 공주소방서 소방훈련
2005년 마곡사에서 열린 공주소방서 소방훈련

그 시작은 공주소방조(公州消防組)에서

공주소방서의 시초는 ‘공주소방조(公州消防組)’에서 시작되었다. 공주소방조는 1911년 10월 공주경찰서의 산하 조직으로 결성되었다. 지금의 소방서와 같이 독립된 공공기관이 아니며, 전문 소방수가 상시 대기하는 구조가 아니었다. 즉, 기관이 아닌 의용적(義勇的) 조직체로서 불이 나면 경종을 난타하여 화재 소식을 전하고, 각 처에서 종소리를 들은 소방수들은 공주경찰서 연병장으로 모인 후 경찰서장의 감독 아래 일사불란하게 불이 난 장소로 가서 불을 끄고 다시 돌아가는 구조이다. 또한 그들의 임금은 추후에 화재 출동수당을 지급받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모든 조직은 체계가 있는 법, 공주소방조 또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1924년 조선총독부 관보 제3120호에 의하면 소방수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조두(組頭) 1명, 부조두(副組頭) 1명, 연대장과 같은 소두(小頭) 4명, 그리고 소방수가 70명이었다. 모두 합쳐 약 77명의 구성원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함께 활동하였다. 하지만 그 수가 매번 일정한 것은 아니고 조금씩 늘어나기도 하였다. 소방조의 공식적인 훈련은 1년에 총 3회 정도 이루어졌다. 연초에 이루어지는 신년 출초식(出梢式)이 있고, 4~5월에 이루어지는 춘계 소방훈련, 10월에 이루어지는 추계 소방훈련이다. 매회 아침 7∼8시경에 격종하면 소방수들은 공주경찰서 앞 연병장에 집합하여 점열을 실시한다. 때로는 도청 연병장이나 공주시장의 금강관 앞 공터에서 실시할 때도 있다. 9∼10시경이 되면 출동하여 공주금융조합 근처 제민천가에서 양수(揚水)훈련을 한다. 이때 소방조의 일본인과 조선인이 갑을 양측으로 나누어 성대한 연습을 하는데, 펌프를 통해 뻗어가는 물줄기를 보기 위해 관민 다수의 사람이 몰려 그 일대가 성황이었다고 한다.

공주소방조는 괄목할 만한 성장으로 조직된 지 약 10여 년 만인 1921년 5월 12일 건물 1층을 확장하기로 하였다. 이때 양수를 위한 신식기계로서 가솔린펌프를 새로 구입하게 되었는데, 공주군민으로부터 받은 기부금 7천여 원으로 구입하였다. 또 그 이듬해에는 공주 원도심 중앙에 망화대(望火臺)를 설치하여 화재의 진원지를 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공주의 제2 부호이자 자선활동을 활발하게 하였던 김윤환(金閏煥, 1870∼1936)이 1926년 약 600원의 기부금을 내어 공주소방조의 여러 소방 기계를 추가로 구입할 수 있었다.

조선인소방조의 차별로 공주소방조 분소, 그러나 다시 부흥

그런데 1926년 8월 공주소방조가 분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의례 조선 사람과 일본인이 서로 모이며 일하는 곳에는 반드시 충돌이 있게 마련인데, 공주소방조에서도 조선인 소방수와 일본인 소방수를 차별하는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소방조의 표창자 중에 일본인이 13인, 조선인이 1명이라는 수적 차이만 보아도 그 차별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동아일보』 기사에 보면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실려 있는데, 공주소방조를 지도 관리하는 공주경찰서장이 조선인 소방수에게 건낸 언어도단의 차별적 행동이 불씨가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그동안 공주소방조 간부추선에 있어서도 매번 일본인이 선정되었던 부분에 이의제기가 수차례 있어 오던 중이었다. 또한 단 한 사람의 조선인 부장이라도 채용해 달라는 요청에 공주경찰서장은 차후에는 반드시 조선인 간부를 채용하겠다는 지난 서약이 있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서장은 일본인 공적자를 추대한다는 관례가 있는 데다, 조선인 간부 채용은 시기상조와 자격부족이라는 말과 함께 조선인 소방수를 무시하는 모욕적 언행을 일삼아 더욱 일을 크게 만들었다.

이에 조선인 소방수 30여 명은 공주불교 포교당에 모여 동맹 사직을 결의하고, 소방복과 기구 등 모든 것을 일본인 조두의 집으로 보내 소방활동 거부 의사를 전했다. 그럼에도 공주경찰서장의 움직임이 달라지지 않자, 결국 조선인 소방조 일동은 공주소방조를 분소(焚燒)하여 그 뜻을 전했던 것이다. 이에 소방수들의 결원으로 공주 군민의 재난관리 부재를 우려하였던 공주 유지들은 중재를 나섰다. 특히 변호사를 지낸 박춘서(朴春緖), 충청남도평의회 의원을 지내기도 했던 임창수(林昌洙), 하야가와 분코(早川分後), 마루야마 토라노스케(丸山虎之助) 등의 중재로 수일 만에 원만히 해결되어 공주소방조는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다.

1935년 10월 3일 신축된 公州消防組 준공 기념사진(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1935년 10월 3일 신축된 公州消防組 준공 기념사진(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한편, 처음 지어져 분소된 공주소방조 건물의 위치는 지금까지 어디인지 정확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하지만 1937년 『공주읍읍세일반』에서 공주읍 욱정(지금의 반죽동)에 있다는 공주소방조는 공주읍사무소 부근으로, 공주경찰서와 함께 가까이서 화재 시 출동과 업무의 효율을 기하고자 그곳에 새롭게 건축되었다. 1935년 10월 공사비 약 2천여 원을 들여 신축된 공주소방조 건물의 크기는 약 평방 240 제곱미터로 약 72평의 면적이니 그 규모가 꽤 컸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1년에 약 1,485원의 경비로 공주읍의 본정, 욱정, 상반정, 대화정, 금정, 산성정 등 6개 구역의 총 2,495개 호수를 관할하였다. 한편 공주에는 공주읍내를 관할하는 공주소방조 외에 유구소방조, 이인소방조, 광정소방조, 호계소방조(사곡면), 대교소방조(장기면), 탄천소방조, 경천소방조(계룡면), 우성소방조, 신하소방조(신풍면) 등이 있었다.

공주소방조의 화재 진압 활약

화재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 언제 어느 곳에서 불이 날지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바로 화재이다. 또 화재 뿐 아니래 홍수와 같은 수재(水災) 등 여러 재해 현장에 소방조의 대원들은 주야한서를 불분하고 구제 현장에 전력하여 왔다. 『동아일보』 의 1929년 12월 기사에 보면 한 겨울에 호남자동차회사 운전사 목일성(穆一成)의 집에 화재가 났다. 그의 집은 공주면 금정 지금의 교동에 있었는데, 한겨울 밤 불이 나자 각처의 경종을 난타하여 소방조가 출동하여 전력으로 화재를 진압하여 다행히 이웃한 건물로 번지지 않게 불을 껐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 1939년 8월에는 공주와 이웃한 논산 강경의 큰 화재진압에 원조한 사례도 있었다. 장작불에서 시작된 불꽃이 강한 바람에 의해 조선미곡창고, 강경주조장으로 불이 번지며 삽시간에 대형 화재로 커지자 논산소방조 뿐만 아니라 공주소방조에서도 지원을 나서 불을 진압했다고 한다.  

공주소방조의 조두 오오니시 코우키지(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공주소방조의 조두 오오니시 코우키지(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그런데 때로는 소방수들이 공주에 없어 큰 불을 막을 수 없었던 때도 있었다. 때는 바야흐로 1931년 충남도청 이전의 문제로 공주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져 있을 때이다. 그해 2월 23일 『조선신문』에는 공주시장에서 발생한 화재가 대서특필 되었다. 시장 내 지나인(支那人) 즉 중국인 잡화상에서 시작한 불길로 금강관, 시장사무소, 중앙사진관, 목재점 등 중요 건물 약 7동이 연소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는 충남도청 이전 문제로 이미 1월 13일 공주소방조 조두 오오니시 코우키지(大西幸吉)를 비롯한 80여 명이 사표를 내 활동하지 않고 있었다. 오오니시는 공주에서 화약 및 자전거를 판매하던 농천상점(瀧川商店) 공주지점장이기도 한데(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 ⑥ ‘공산성에서 전국자전거대회를 했다고?’ 참조), 1915년 6월부터 공주소방조에 들어와 1925년부터 7년간 공주소방조의 조두를 맡는 등 총 17년간 공주소방조에서 활동하였던 인물이다. 당시 공주 경찰은 공주소방조가 해산되었기 때문에 당황하는 중에 가솔린펌프가 있어도 사용할 줄 몰라 손으로 직접 기계를 돌려 양수하는 등 어설픈 진화로 불길을 잡지 못해 더욱 가옥의 손실이 커졌던 것이다.

이후에도 그해 5월 18일 밤 9시 공주의 유일한 포목 겸 잡화상을 경영하는 윤종혁(尹宗赫)의 계명상회(啓明商會)에 불이 나 불길이 이웃한 김석문(金錫文)의 집을 비롯한 3호를 전소한 일이 또 발생하였다. 당시 계명상회의 주인 윤종혁이 마침 절로 요양하러 떠나 상점에는 점원들밖에 없는 상황에다 공주소방조도 해산되어, 공주경찰서에서 불을 진압하려 애를 썼지만 계명상회는 전소하여 손해액이 만여 원 가량이었다고 한다.

한편 충남도청 이전문제로 잠시 해체되었던 공주소방조는 그 이듬해 다시 결성되어 소방활동을 진행하였고, 1933년 3월에는 공주군내 소방조들이 모두 모여 연합소방훈련을 하기도 하였다.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은 공주소방조

이처럼 열성을 다한 공주소방조의 소방수들에게 주어지는 수당이 어느 정도였을까. 1937년 『공주읍세일반』에 1년 운영비가 1,485원이라고 하는데, 구체적인 항목별 지출비가 기록되지 않아 임금의 정도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운영비 전액이 약 77명의 소방수 전원에게 쓰인다고 하더라도 1명당 20원도 채 안되는 수당이 주어지는 셈이 되니 많은 돈은 분명 아니다. 게다가 이처럼 근소한 수당 지급에도 불구하고 소방수들은 공주 사람들을 위한 기근구제에도 나섰다. 1924년 12월 31일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화수재해의 구제에 전략하여 온 소방수들이 그 공로로 상여금을 받았는데, 그 중 조선인 소방수들이 1인당 50전씩 각출하여 합 13만 원의 거액을 공주 기근구제회에 기부하여 지역사회의 신망을 받은 것이다.

이러한 소방수들의 노고와 선행에 1년에 세 번 있는 공식적인 소방훈련이 있을 때면 소방수들을 위한 연회가 빠지지 않고 벌어졌다. 오찬이나 석찬으로 공주시장에 있는 금강관이나 충남도청에 있는 순사교습소(지금의 KT&G 공주지점) 등에서 소방수들을 위한 위로연이 개최되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소방조 가족 위로회도 벌어졌다. 1925년 7월 공주소방조 주최로 경찰관 및 소방조 가족의 위안회를 금강관에서 열었는데, 활동사진을 상영하고 과자와 아이스크림도 함께 지급하는 등 성황리에 진행되었다고 한다.  

1926년 10월 9일 공주앵산공원에서 열린 공주소방조 15주년 기념식(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1926년 10월 9일 공주앵산공원에서 열린 공주소방조 15주년 기념식(출처: 대한민국신문 아카이브)

또 소방조 활동을 꾸준하게 해온 근속자와 소방활동 또는 소방조 운영 및 관리에 특별히 힘써 온 공로자를 위해 꾸준하게 포상하는 일이 있었다. 1926년 10월 9일은 공주소방조 창립 15주년이었다. 당시 기념축하식은 오전에 공주금융조합 근처 제민천변에서 공식소방훈련을 마치고 정오부터 앵산공원 초혼사(지금의 3.1중앙공원 내 4.19학생혁명기념탑 자리)에서 열렸다. 유성준(兪星濬) 충남도지사를 비롯해, 좌백(佐伯) 충남경찰부장, 김갑순 공주군수 등 지역의 고관들과 공주유지 및 군민들이 모였다. 이때 근속자와 공로자에 대한 표창이 이어졌으며, 감사장과 함께 시계 또는 은잔의 상품도 함께 주어졌다.

광복이후 공주소방대의 발족과 공주의용소방대의 활약

광복 이후 공주소방조는 1945년 9월 15일 ‘공주소방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발족하였다. 그 후 1948년 3월 1일 ‘공주소방서’로 승격하여 조직체를 새롭게 재편성하였다.(1988년 공주군지 참조) 1949년 3월에는 공주군내 각 소방간부들이 모여 타합회(打合會)를 실시하였는데, 많은 관민다수가 함께 자리한 가운데 일제강점기 때의 소방훈련과 마찬가지로 공주경찰서장과 시소방연대장의 훈시가 있은 후 맹열한 소방훈련이 이어졌다. 또 1950년 1월 14일에는 공주읍 중동공립국민학교 2교정에서 각 관공서장 및 지방 유지가 참석하여 시동식을 거행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50년 6.25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주소방서는 화재진압에서 보다 확대된 ‘방공단’으로서 개편되기에 이르렀다. 이때 전쟁으로 각 지역에서 화재가 자주 발생하자 의용소방대의 역할이 더욱 필요해졌다. 그래서 1953년 12월 정부는 각 시도 경찰국에 의용소방대를 편성하고 소방경찰관의 보좌협조를 맡게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1949년 10월 공산성 쌍수정 앞에 선 공주군의용소방대(출처:공주학연구원 공주학아카이브)
1949년 10월 공산성 쌍수정 앞에 선 공주군의용소방대(출처:공주학연구원 공주학아카이브)

그러나 이미 공주에서는 공주군의용소방대가 결성되어 있었다. 결성 시기가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1949년 10월 공주의용소방대가 공산성 쌍수정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한 사진이 남아 있다. 1954년 1월 11일 소방대광장에서 각 기관장 관민다수 참석리에 발대식을 거행되고 대장에는 전 방공단장 장동욱(張東旭) 씨가 임명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그것은 신년발대식으로 보인다.

그 이후에도 공주의용소방대는 활발하게 활동하였는데, 화재뿐 아니라 공주군민의 안전사고에도 자주 출동하여 봉사하였다. 특히 공산성 주변 금강가나 고마나루 부근에서 익사 사고가 자주 발생하였는데, 그때마다 공주의용소방대원들의 활약이 대단하였다고 한다. 공주의용소방대는 지금도 공주의 안전파수꾼으로서 공주 지역사회의 안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집필자: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책임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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