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최명진 공주석장리박물관 학예연구사

실록에는 고려 마지막 왕손 ‘왕거을오미’가 조선초 개성왕씨 대량학살을 피해 공주(公州)에 숨어 살다 발각된 기록이 있다.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 같은 왕손의 이야기는 과연 사실일까? 그런데 어떻게 그는 공주와 인연을 가졌고, 어디에 숨어 살았던 것일까. 이번 글에서는 공주를 배경으로 한 고려 마지막 왕손의 비밀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조선초 개성왕씨 대량 학살에서 생존

태종실록 26권, 1413년 11월 19일
태종실록 26권, 1413년 11월 19일

조선 초 1394년에 벌어진 개성왕씨 학살 사건은 유명하다. 공식적인 왕씨 사망자 수만 해도 마지막 공양왕을 포함해 154명에 달했고, 국법으로 왕씨를 숨겨주는 일은 금지되었다. 왕씨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듯 했다.

그런데 약 20여 년이 흐른 1413년 고려 왕손이 살아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며, 조정이 떠들썩해졌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1413년(태종 13) 11월 9일 지신사 김여지金汝知는 할머니의 상중에 편지를 한 통 전해 받았다.

발신자는 공주 사람 이밀충李密沖이란 인물이었다. 편지에는 ‘고려왕조의 왕휴王庥라는 자가 나의 누이를 첩으로 맞아 아들을 두었는데 이름이 거을오미居乙吾未입니다.

그런데 이제 곧 20살이 되어 호패를 차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입니다’ 라는 내용이었다. 김여지는 고민 끝에 편지를 불태웠지만, 며칠 후 스스로 태종에게 찾아가 보고하고 말았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순금사는 즉시 공주에 관리를 파견해 왕거을오미와 관련자들 약 60여명을 압송해왔다. 거을오미의 계부 오인영吳仁永, 외삼촌 이밀충, 고모부 우홍부禹洪富, 우홍부의 아들, 왕휴의 처 권씨, 왕휴의 사위, 왕휴 형의 사위들까지 줄줄이 체포되어, 모진 심문을 당했다.

거을오미는 당연히 죽여야 한다며 대간, 형조의 상소가 빗발쳤다. 그런데 태종 이방원은 애초 김여지에게 보고받았을 때부터 죽일 생각이 없었다.

시간도 흘렀고, 아무 잘못도 없는 왕씨 후손을 이유 없이 죽이는 것은 이제는 부당하다며 "금후로는 왕씨의 후손이 혹은 스스로 나타나거나, 혹은 남에게 고발을 당하는 자는 아울러 자원(自願)하여 거처(居處)하는 것을 들어주어서 그 삶을 평안하게 하라"며 거을오미의 석방을 단행했다. 그리고 김여지는 파직, 우홍부는 고신(임명장)을 몰수당하며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왕거을오미는 누구인가? 

거을오미 발각 이전 종종 다른 지방에서 숨어 살던 왕씨들이 발견 즉시 살해되었던 것과 달리 그의 석방은 이례적이었다. 이를 계기로 사실상 왕씨의 시련은 막을 내린 것과 다름없기에 거을오미는 더욱 주목된다.

우홍부의 묘비(경기도 여주)
우홍부의 묘비(경기도 여주)

실록에는 거을오미가 ‘왕휴王庥’의 아들이라고 전할 뿐 왕휴가 누구인지, 이들의 가계를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거을오미의 고모부 우홍부(1355〜1414)가 개성왕씨 순흥군 왕승王升의 사위라는 우홍부 묘비의 기록이 확인됨에 따라 결국 왕승(조부) → 왕휴(부친)→ 거을오미로 이어지는 가계를 확인할 수 있었다.  

순흥군 왕승은 여말선초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고려왕손이다. 뛰어난 능력으로 태조 이성계의 무한한 신뢰를 받았는데, 특히 왕승의 아들 왕강王康에 대한 신임은 대단했다. 왕강은 그 어렵다는 태안의 굴포운하 개설을 추진력 있게 착수하였고, 이성계는 ‘고려 40년 동안 통하지 않던 조운의 길을 열었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그러나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그 능력이 문제였다. 오히려 큰 화가 될 씨앗으로만 보인 것이다. 결국 1394년 2월 26일 왕강은 공주 일신역에 유배되었고, 이후 정황은 확실하지 않다.

실록에는 ‘동성의 아우 조카까지도 유배를 보내야 한다.’라고 했으니 왕승의 아들이었던 왕휴도 이때 공주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추측될 뿐이다. 신하들이 극구 거을오미의 존재를 없애려 한 이유는 조선건국 당시 그토록 경계했던 순흥군 왕승과 왕강의 후손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왕손을 숨겨준 공주 사람들

실록에는 거을오미 사건으로 고초를 겪었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거을오미를 지켜낸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공주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그들은 누구일까.

우선 지신사 김여지, 거을오미의 계부 오인영, 외삼촌 이밀충이란 인물이다. 사실 이 사건의 모든 발단은 공주에서 인연을 맺은 이 세 사람에서 시작되었다.

김여지의 본관은 연안이며, 1389년(창왕 1) 문과에 장원급제한 후 조선 초까지 우정언, 계림부판관, 예문관직제학, 지신사 등을 역임한 고위 관리였다.

실록에 따르면 김여지는 공주에 농장이 있었고, 자주 드나들었다. 연안김씨의 선산이 신기동쪽에 있고, 김여지의 형 후손들이 공주에 거주한 사실을 보면 공주와의 인연은 확실하다.

거을오미 사건 그 다음해에 충청도관찰사로 부임하기까지 한다. 김여지는 이미 거을오미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오인영과 김여지는 선대부터 친분이 있고, 집도 가까워 노비들끼리도 서로 알 정도였다고 했기 때문.

오히려 김여지가 태종에게 보고한 것은 거을오미의 존재를 표면화시키고, 왕씨 학살의 종지부를 찍게 하였던 것이니 결과적으로 보면 그가 이러한 결과를 기대한 전략적 의중까지 엿보인다.

한편 오인영과 이밀충은 누구였을까. 중앙 관리였던 김여지와 편지를 나눌 수 있었을 정도의 친분으로 보아 평범한 시골 농사꾼 정도로만 보기는 어렵다.

안타깝게도 계부 오인영과 외삼촌 이밀충의 가문 등에 대한 정보는 더 찾아지지 않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공주에 터전을 두고 살았던 공주사람은 확실해 보인다.

또 한명의 인물은 거을오미의 고모부인 우홍부이다. 우홍부는 여말선초 정계를 두루 거친 인물로서 고려말 관료이자 학자인 양호당 우현보禹玄寶(1333〜1400)의 아들이다. 우현보는 아들 우홍부를 순흥군 왕승의 사위로, 장손인 우성범禹成範을 공양왕의 사위로 만드는 등 고려시대 단양우씨 가문 위상을 높인 인물이다.

또한 목은 이색, 이숭인, 정몽주 등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정몽주가 살해 됐을 때 시체를 거둬 장례를 치러준 일로 유배될 정도로 친고려적 성향이었다.

고려가 망하고 유배와 탄핵을 받았지만, 결국 이방원에게 협조하여 아들 우홍부와 함께 공신에 책봉되며 재기했다. 이렇듯 역사 속 중요한 입지를 가졌던 우홍부가 갑자기 거을오미를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아들들과 함께 체포된 것이다.

이들은 몰래 거을오미를 지원했을 테지만 구체적인 죄목은 알 수 없다. 단, 흥미롭게도 단양우씨 가문도 이미 공주에 기반을 둔 정황이 포착된다. 공주에서 가장 오래된 묘비라 하여 공주향토문화유적 16호로 지정된 우공로(?〜1499)의 묘 때문이다.

공주 탄천 송학리 우공로 묘와 묘비
공주 탄천 송학리 우공로 묘와 묘비

묘비에는 그의 조부가 우홍부임을 기록하고 있다. 즉, 거을오미를 제외한 나머지 인물 김여지-오인영-이밀충-우홍부 모두 공주에 이미 연고를 가졌다.

그렇다면 이들의 인적 네트워크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고려왕손이 공주에 숨어든 단서의 열쇠는 이들이 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려왕조 마지막 흔적이 남은 공주   
 
공주 왕촌에는 여러 구전, 지명이 남아 있어 거을오미가 숨어살았던 곳이 이 곳일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왕씨가 숨어 살았기 때문에 왕촌이라 했다는 지역의 구체적인 구전이 있고, 곳곳에는 피난골, 왕씨들의 묘가 있다는 왕산목골, 왕산소 등의 지명이 남아 있다. 오래된 마을 구전일 뿐일까.

실록에는 구체적으로 거을오미가 공주 어디에서 살았는지는 나오지 않지만, 공주 왕촌에는 왕산소라는 지명이 분명이 남아 있고, 실제 왕씨들의 묘를 확인할 수 있었다.

왕산소로 올라가는 길은 마을 주민들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숲이 우거졌으며 지금은 마을 사람들도 잘 다니지 않는 곳으로 혼자서는 찾을 수 없을 정도이다.

마을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매우 오래전에 왕씨들 집안에서 비석을 묘까지 옮겨달라는 요청을 받아 현재 왕산소로 올라가는 길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파묘해 간 후 한기만 남아 있었으나 봉분을 거의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고 비석은 찾을 수 없었다.

왕산소 전경과 왕씨 묘소 현재 모습
왕산소 전경과 왕씨 묘소 현재 모습
삼은각(충남문화재자료 59호)
삼은각(충남문화재자료 59호)

한편, 왕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공주 동학사에는 고려 왕조 최후와 관련된 유적 ‘삼은각三隱閣’이 존재한다. 이곳에는 고려 멸망 후 절개를 지킨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 등 고려 충신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은 고려 멸망 직후인 1394년 야은 길재가 동학사에 단을 쌓고 고려의 왕과 정몽주를 제향하면서 시작되었다하여 주목된다. 그렇다면 고려멸망 직후 거을오미는 왕촌에 숨어들었고, 길재는 동학사에 제단을 마련한 것인가. 왜 공주였을까.

이 또한 풀어야할 과제이기도 하다. 이렇듯 왕촌에 남은 왕손의 기록되지 않은 삶, 왕손을 도왔던 공주 사람들, 고려 왕실 영혼들이 잠든 왕촌과 삼은각의 현장은 공주지역만이 가진 특색 있는 자료로 주목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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