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준공예정인 ‘공주시청년센터’ 조감도
2021년 준공예정인 ‘공주시청년센터’ 조감도

공주 중동의 옛 제일은행 자리에서는 직전에 운영되었던 서점을 허물고 현재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그곳에 세워지는 것은 바로 ‘공주시청년센터’. 올해 말경이면 우리 지역 청년들간의 소통과 학습, 그리고 취업·창업의 공간으로 거듭날 예정이다. 단체이기 보다 개인을 더 선호하는 요즈음 젊은 세대들에게 서로 소통하며 여러 가지 정보를 교환할 수 있고, 취업이 어려운 이때 사회에 발을 디디고 나아가기 위한 준비와 창업을 통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기회의 공간으로 활용할 계획이다. 필자도 이곳이 공주시 청년들을 위한 플랫폼 공간이 되어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이처럼 요즈음 젊은 청년들에게는 나의 미래와 취업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청년들에게는 무엇이 중요하고, 또 어떤 활동을 했을까?

공주청년단체의 시작,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

당시 청년단체의 ‘청년’은 지금의 청년과는 그 의미가 사뭇 달랐다. ‘양반집 아들’, ‘젊은 유지’, ‘신사(紳士)’ 등의 이름으로 불린 그들은 부유한 환경에서 신교육을 받아 새로운 문화를 전파하려는 혁신가들이었다. 당시의 청년들에게 주요한 핵심 키워드는 바로 ‘민중계몽(民衆啓蒙)’이였다. 일명 청년운동으로서 일제에 의한 사회적 억압 속에 학업과 자주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들이 학습한 교육을 바탕으로 민중을 계몽하는 것이 그들의 큰 과업이었다.

1919년 분수령과 같았던 3.1만세운동 이후 조선은 많은 변화를 맞이하였다. 일제의 식민통치가 문화통치로 선회하면서 전국에서 많은 청년수양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이들은 조선총독부가 지역의 관료와 유지의 지역지배 체제를 형성하기 위해 그 조직을 장려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지역의 여론과 민의를 대표하였다. 그리고 야학이나 강연회와 같은 민중계몽활동과 연극회, 체육회, 연주회 등의 문화활동을 주최하며 지역의 사회문화를 이끌어 나갔다.

공주영명학교 10회 졸업사진으로 윌리엄스(우리암) 교장 부부와 교사 및 학생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윌리엄 교장의 부인 바로 옆이 신현구이며, 윌리엄 교장 옆이 조병옥, 맨 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황인식이다. (출처: 공주학아카이브/이종옥 제공)
공주영명학교 10회 졸업사진으로 윌리엄스(우리암) 교장 부부와 교사 및 학생이 함께 찍은 사진이다. 윌리엄 교장의 부인 바로 옆이 신현구이며, 윌리엄 교장 옆이 조병옥, 맨 앞줄 왼쪽 첫 번째가 황인식이다. (출처: 공주학아카이브/이종옥 제공)

그런데 공주에서는 이보다 훨씬 전부터 청년운동의 조짐을 갖고 있었다. 『황성신문』 기사에 의하면 1910년 7월 공주의 신사 신현구(申鉉九), 이중우(李重雨), 김기홍(金基鴻 혹은 金基鶴), 김인태(金仁泰) 등 20여명이 공주에 청년구락부(靑年俱樂部, 구락부는 클럽의 일본식 표현)을 설립하였다. 특히 신현구(1882∼1930)는 1919년 3.1운동 직후 조직된 비밀결사단체 대한독립애국단을 이끈 독립운동가로 이름난 인물이다. 그는 논산출신의 기독교인으로 공주의 미북감리교 선교사 윌리엄스(우리암)을 만나 공주영명학교 한문교사로 활동하였다. 이 때 이중우, 김기홍과 함께 청년구락부를 조직해 매일 회동하며 지식을 강구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활동내력과은 크게 알려지지 않았다. 빠르게 소멸되었거나 한일병합이 이루어진 경술국치 시기 비공식으로 구락부 활동이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던 사연이 있었을 수도 있겠으나, 이들의 활동이력은 좀 더 깊은 연구가 필요하다. 

공주청년회와 청년구락부를 합쳐 공주수양청년회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 전국의 청년수양단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을 때,  공주에서는 이보다 1년 앞서 1918년 즈음 ‘공주청년회’가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의 서덕순(徐德淳)과 공주영명학교 교사를 지낸 김수철(金洙喆), 공주공립농업학교 교사를 지낸 노정학(盧庭鶴) 등이 움직여 설립하였다. 또 공주청년회에 이어 1920년 음력 정월에 시대의 진보를 따라 1910년 결성된 청년단의 이름과 같은 ‘공주청년구락부’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일본 유학을 다녀와 공주에 학교 설립에 힘 쓴 이현주(李顯周), 자동차부를 운영했던 육진형(陸鎭衡),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공주소년군 신대장을 지내기도 했던 서겸순(徐謙淳), 구한말 주사를 지낸 이범규(李範珪), 이상덕(李象德)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이들은 신파 연극단을 조직하여 제민천변 금강관에서 모여 매일 실습하며 연극회를 열며 활동하였다.

그러다 이 두 청년단체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해에 그 기능을 합쳐 ‘공주청년수양회(公州靑年修養會)’를 발족하였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두 단체가 조직을 통합한 시기로 1919년 7월을 언급하고 있으나, 이는 오기인 듯 하다.  『동아일보』에는 조직기념 행사에 대한 소식을 게재하고 있는데, 1922년 7월 24일 기사에서 7월 17일 청년수양회 창립 2주년 기념 축하회를 공주공립보통학교 운동장에서 공주관민 천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성대하게 열었다는 내용을 보아 공주청년수양회의 창립 시기는 1920년 7월경으로 보아야 한다. 

이렇게 결성된 공주청년수양회는 회장 아래 교육부, 덕육부, 체육부, 구락부, 재무부 등 5개의 조직으로 나누어 운영하였다. 그 이후 1921년 7월 24일경 공주공립보통학교에서 총회를 개최해 임원들을 재선발하여 조직체계를 다시 갖추었다. 회장에 류정현(柳靖鉉), 부회장 성보영(成普永), 총무 이상덕(李象德)과 이현주(李顯周), 교육부장에 서덕순(徐德淳), 덕육부장에 이익모(李益模), 체육부장에 이범규(李範珪), 구락부장에 노정학(盧庭鶴), 재무부장에 권석신(權石臣) 등 이상 23인의 임원을 새로 구성해 새로운 의기를 다졌다. 통합 당시 공주 청년유지 140여명이 참여하였던 청년수양회는 통합된 지 1년 만에 200명으로 증가하며 그 규모는 점점 확장되어 갔다.

순회교육극단과 노동야학에 힘써
 
새로운 이름의 공주청년수양회에서 주로 활동한 분야는 부서명에서 엿볼 수 있듯이 집회강연, 야학강습과 연극공연, 체육활동과 음악회 등이 있다. 청년수양회의 발족 이후 근래에 가정 먼저 실시한 것은 체육행사였다. 1920년 7월 30일 청년수양회체육부 주최로 강경, 대전, 청주, 조치원의 청년회와 함께 조치원에서 야구대회를 개최하여 친목을 다졌다. 또 8월 7일에는 지육부와 덕육부 주관으로 제1회 강연회를 산성공원 영은사 내에서 개최하였으며, 이어 ‘민중의 지식계발은 생활의 필수’라는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하였다. 이외에도 수시로 지역 내 학교, 단체들 대항 정구·축구대회를 열거나 유아체육대회 등을 지원하기도 했다. 또 공주영명학교 강당에서 음악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예산 등 타지역으로 음악대가 초청받아 원정연주회를 가기도 하였다. 

공주청년수양회의 활동 중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 온 것 중 하나가 순회연극단의 활동이었다. 청년수양회에서는 지역의 교육열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연극단을 조직하고 ‘재봉춘(再逢春), 양복광(洋服狂), 보은(報恩), 문맹(門盲)’ 등의 교육연극을 창작해 매일신보 충남지국의 후원을 받아 남부지방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공연의 입장료와 동정금(일종의 기부금)을 수입으로 잡아 본 극단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순회공연은 구락부장 노정학을 필두로 1921년 9월 17일부터 이틀에 걸친 공주 금강관 공연부터 시작되었다. 100원의 입장료를 부과해 다수의 공주군민들이 참여한 이 날 공연에 8백원의 동정금이 모아졌다.

『매일신보』의 공주청년수양회 순회연극 광고문(출처: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매일신보』의 공주청년수양회 순회연극 광고문(출처: 대한민국 신문아카이브)

공연이 끝나자 연극단 일행 13명은 자동차 2대로 나뉘어 순회공연을 떠났는데, 강경을 비롯해 전주, 군산, 광주, 목포, 통영, 마산, 부산, 대구, 경주, 대전, 조치원 등 조선의 남부지역을 9월 19일부터 10월 3일까지 약 20여일의 일정으로 순회하였다. 각 지역마다 5-600명 이상의 관객이 참여하는 등 성원 속에 이루어진 순회공연은 마지막 조치원 공연을 마치고 10월 4일 공주로 돌아왔다. 그들은 금강교 앞에 마중 나온 회원들과 함께 행진곡에 맞춰 도보로 공주읍내로 돌아와, 금강관에서 무료로 회보극을 순연하였는데 이 때 모인 사람만 900여명에 달했다.

이러한 공주청년수양회의 활약에 힘입어 공주의 부호로 이름난 김윤환이 거액의 기부금을 냈다. 청년수양회의 고문이기도 한 그는 1922년 공주고등보통학교 설비로 1만5천원을 기부할 때, 청년수양회관을 설립을 위해 추가로 2천원을 더 기부한 것이다. 그들은 음악대를 결성해 공주면장을 대동해 김윤환의 자택을 들러 감사를 표했다. 청년회관은 그 이듬해인 1923년 상반정 1번지 홍익표씨 소유 와가 10여칸을 매수한 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청년수양회가 교육극단의 순회공연 이외에 특히 집중한 것으로 노동야학(勞動夜學)도 있다. 『동아일보』 기사에 의하면 1922년 10월 9일부터 입학생 약 100명을 모집해 청년회관에서 야학을 운영했다. 배움을 시작할 나이가 지나도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입학할 수 없는 학생들을 위해 야학강습소를 설립해 매번 평균 7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했다. 당초에는 경비가 부족해 1923년 3월까지만 운영하려고 계획했으나 계룡면, 주외면, 우성면 등 20리가 넘는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는 학생들이 늘어나 영구히 운영하기로 하였다.

한편, 공주청년회는 주요활동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1922년 충남고보 유치활동이다. 당시 충남고보 유치문제를 둘러싸고 공주유지들은 홍성유지들과 더불어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해 충남고보의 공주유치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 활동으로 청년수양회는 공주군민들의 공론을 이끌며 지역사회를 이끌어나가는 주역으로 더욱 인정받을 수 있었다. 공주고등보통학교는 지금의 공주고등학교로 성장해 내년 2022년 개교100주년을 앞두고 있다.

청년혁신운동으로 결국 해체

1920년대 중반경 공주청년수양회 내부에서는 청년회 혁신운동의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1924년 조선내의 모든 청년수양단체들이 연합하는 ‘조선청년총동맹’이 결성되면서 지역계몽활동과 같은 신문화운동에서 사상문화운동으로 변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주에서 혁신청년운동을 주도한 사람들은 동아일보나 조선일보와 같은 국문신문사 공주지국 기자들이었다. 결국 1925년 11월말 경 공주청년수양회는 ‘공주청년회(후에 공주청년연맹으로 불려지기도 함)’로 바뀌고, 회장제도 위원제로 바뀌었다. 그리고 차츰 내부분열이 일어나면서 1927년 5월 총회에서 혁신청년들은 초창기 청년수양회를 이끌었던 유정현, 서범순, 김수철, 김영배 등과 대립하며 청년회를 장악했다. 그들은 그해 6월 1일 조선청년총동맹의 혁신운동강령을 채택하며, ‘민중본위인 합리적 신사회건설의 역군이 될 만한 훈련과 교양에 노력하고, 조선민중의 정치적 경제적 가성을 촉진하고, 일체의 파벌주의를 근본적으로 배제’한다는 강령을 고수하였다.

1932년 홍루두 여사의 기부금으로 완성된 공주청년회관
1932년 홍루두 여사의 기부금으로 완성된 공주청년회관

그러나 이와 같이 공주청년회의 혁신적인 움직임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불러왔다. 결국 1929년 8월 산성공원 야유회에서 ‘세계약소민족만세(世界弱少民族萬歲)’ 구호를 외쳤다는 혐의로 공주청년회 주요 인사들이 구금되었고, 이후 공주경찰서는 청년회 주최의 모든 집회를 불법으로 규정해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급기야 1931년 청년회 간부 박종열 등 3인이 수사를 받아 청년회관이 압수수색 되는 험악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위축된 분위기를 만회하기 위해 퇴락해진 청년회관의 개축공사를 시작하였는데 공사비의 부족으로 이마저 거의 1년 간 완성을 이루지 못했다. 때마침 대화정에서 남편과 자식 없이 살고 있던 79세 홍루두(洪累斗) 여사가 300원을 기부하고, 가옥건축업자들이 무료로 공사를 진행해 청년회관 신축을 완성할 수 있었다. 홍루두 여사는 이후 전재산을 공주감리교회에 기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1932년 3월 청년회위원장 윤귀영과 공주소년연맹 간부 안병두가 공주영명여학교 기숙사에 산포한 반제격문(反帝檄文) 사건이 일어나며 공주청년회가 해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당대 공주의 청년활동은 지금의 청년활동과 분명 다름이 존재한다. 청년구락부, 청년수양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각종 문예활동과 강습야학을 운영하며 신문화 운동을 주도하고, 공주군민의 염원이었던 충남고보의 유치에 크게 활약 하는 등 지역민 목소리의 창구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의 군수와 경찰서장 등 관료의 적극적인 후원이 바탕이 되었고, 동시에 이 활동으로 청년유지들도 그들의 경제적·사회적 위상을 유지할 수 있었다. 즉 관료와 유지들의 유기적인 관계 아래 청년단체들이 존재하였다는 한계가 지적되기도 한다. 이에 새로운 신념으로 신사회를 만들려는 혁신청년들의 활동으로 이어졌다. 비록 내부의 분열과 늘어난 일제의 감시와 탄압 속에 혁신운동은 좌절되고 말았지만, 당시 그들이 꿈꾸는 세상에 집중하며 간절함으로 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지금의 청년들이 취업과 불확실한 미래에 집중하며 살고 있는 것처럼.

※ 『한국의 근대와 공주사람들(지수걸, 1999)』 참조

집필자: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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