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 11

오랜 역사 속에 충청 지방행정의 중심지였던 공주에는 읍치의 상징적 공간인 ‘객사’가 있었다. 고려시대에 외국의 사신을 맞아 접대하거나 중앙에서 파견된 관료들을 유숙하게 하던 공간으로 사용되었던 객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기능이 한 가지 더해졌다. 건물의 중심공간인 주관에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와 궁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두고, 새로 부임해 온 수령이 초하루, 보름 한 달에 두 번씩 궁궐이 있는 북쪽을 향해 절을 하게 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임금을 지척에 모신 듯 충성심을 다하고 목민관으로서의 소임을 다하게 하였다. 그리고서 좌우 익헌 온돌방에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와 사신들이 머물게 하였다.

이 외에도 객사에서는 임금의 위덕을 선포하는 장소로 활용되는가 하면, 객사의 동헌에서는 고을의 큰 연회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또, 관찰사가 송사를 듣고 재판하거나 지방의 향시가 치러지기도 하였다. 이처럼 객사는 조선시대 지방 읍치의 공간으로서 국가의 왕권을 상징하던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런데 대한제국시기에 이르면서 객사의 기능은 또 다시 변모하기 시작하였다. 갑오개혁 이후 지방에서 관학을 담당하던 향교에 근대 학교가 설립되면서 유림과 학교 간에 진통을 겪었다. 그러던 중, 1904년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통치기구였던 통감부가 실시한 식민지교육정책에 따라 각 지방에 있는 객사마저 근대의 학교로 이용하는 것이 확대되었다. 일제의 간섭과 통제 속에 대상을 구분하며 객사이용의 허용과 불허를 반복하였고, 이에 따라 객사나 향교가 지녔던 조선의 유교적 전통성은 상실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공주객사도 역사의 뒤 안으로 사라지게 되었으며, 새로운 근대학교인 ‘공주공립보통학교’로 이용되었다. 공주공립보통학교는 지금의 공주중동초등학교의 전신으로 충남에서 가장 먼저 설립되며 교육도시 공주의 근대교육을 선도하였다. 중동초등학교는 1898년(고종 35) 공주군 의당면 출신의 심기섭(沈驥燮, 1873〜1945)의 노력에 의해 민족사학으로서 설립되었다. 한성사범학교 제1회 졸업생인 그는 근대교육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와 당시 충청도관찰사 김가진으로부터 100원을 지원받아 공주사립소학교를 설립해, 산술, 국어, 습자 등 기초적인 신학문을 가르쳤다. 그러다 1906년 통감부가 보통학교령을 반포하면서 전국 13개 관찰사파견지의 소학교를 우선적으로 보통학교 체제로 개편하였다. 이때, 공주사립소학교도 공주공립보통학교로 개편되었다. 처음에는 보통학교가 일본을 위한 학교라며 학생들이 취학을 거부해 축소되는 듯 했으나, 지방관권과 경찰권들을 동원해 한국인의 취학을 강요하기 시작했다. 결국 새로운 학생모집을 통해 부교원으로 임명된 김제학(金濟學)과 함께 10월 17일 산성공원, 즉 공산성 진남루에서 첫 수업을 치를 수 있었다.

공주공립보통학교는 1년 뒤인 1907년 새로운 곳으로 학교를 이전하였는데, 그곳이 바로 공주객사이다. 객사는 고을에서 가장 서열이 높고 상징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가장 넓은 부지에 건물규모도 상당하여 학교건물로 이용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학교 사정은 매우 열악하였다. 당시 교사들의 월급은 단 15환에 불과해 불만은 여전하였고, 창립 이래 개교식도 치르지 못했다. 이에 교장 심기섭은 학교 이전을 계기로 개교식을 치르고자 행사비용을 위해 학부(學部)에 30원 보조를 받고자 신청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가 창립된 지 불과 4년 만인 1910년 200여명, 1917년에 약 270명으로 학생들이 점점 늘어났다. 또, 객사 부지가 넓고 건물규모도 컸기 때문에 학생들의 학습공간 이외에도 각종 강습회와 강연회, 충남진흥총회, 공주금융조합위원회 총회, 공주청년수양회의 노동야학 등이 열렸다. 그리고 넓은 객사 마당은 운동장이 되어 공주군모품평회, 공주충주간 철도부설을 위한 공주시민대회, 공주청년수양회 설립기념축하회 등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일 수 있었다.

1910년대 초반경 공주객사와 공주시가지 전경
1910년대 초반경 공주객사와 공주시가지 전경

이처럼 학생 수가 많아지고 그 쓰임새가 커지자, 1923년 4월 학교이전이 거론되면서 대화정의 공주고등보통학교 남쪽 부근에 신축이전하기로 내정하였다. 그런데 높은 예정부지 가격이 문제가 되었고, 당국은 주외면 우금치 아래 유곡 약반리에 건설하려 하였다. 이에 그 해 7월 1일 약 9백 여 명의 학부형들이 모여, 그곳은 너무 멀어 어린 학생들이 다니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그리고 신축이전비는 충남도청의 지방비 2만원과 공주군 교육비 6천원, 교사인 공주객사 건물을 매각한 1만원의 수입을 합쳐 약 4만원에 가까운 돈으로 수입을 계획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것은 면민이 부담하여 원안대로 공주고등보통학교 근처에 세우는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해당 부지의 지주와 원만히 교섭하는데에 실패하고 말았다.

결국 학교를 이전하지 않고 당시의 객사 한 켠에 자리한 기숙사자리에 신축하기로 결정하였다. 마침내 이전 거론이 이루어진 그해 연말인 12월 28일 공사입찰을 붙인 결과 경성에서 토목건축 청부업계의 1인자로 알려진 다다 준사부로(多田 順三郞)에게 3만2천9백원에 낙찰되어, 마침내 이듬해 1월 15일경에 신축공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공주객사는 조선식 와가 형태로 규모가 약 110평이었으며, 주변의 부속건물은 2동으로 각각 18평, 14평이었다. 당시 객사 건물들은 주택건물로 개조하여 사용하기에 적당하였기 때문에 무너뜨리지 않고 경쟁입찰을 붙여 매각하였다. 객사건물은 당시 주외면장이 매입해 살림집으로 이용하다가 마지막으로 1964년 춘천에서 이사 온 신각균이 다시 매입해 태을한약방을 운영했다고 한다.(금강뉴스 유승광 「근대 공주 교육의 산실, 공주 객사를 찾았다」)

1940년대 공주공립보통학교 전경
1940년대 공주공립보통학교 전경

마침내 6월 학교는 2층 규모의 콘트리트 신식 건물로 완공되었고, 낙성식이 열린 10월 16일 오후 학교운동장에서는 만여 명의 관중과 천여 명의 학생이 모인 가운데 공주학생대운동회가 열렸다. 그러나 수백 년을 이어온 공주객사의 모습은 더 이상 그곳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공주객사는 지방의 관아시설 중 하나로 조선의 유교적 전통성과 공주의 지역정체성도 함께 내포한 곳이다. 공주목관아를 복원하려고 계획하는 이 때에, 지척에 있는 공주객사의 역사와 흔적도 함께 다루어져야 할 것이다.

(집필자: 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고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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