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암 – 우광복 기념사업 MOU 협정체결

충남 공주의 영명동산에는 110여 년 전 이 땅에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헌신적인 삶을 살다가 순교한 샤프(Sharp) 선교사를 비롯하여 네 명의 선교사 자녀들이 묻힌 아담한 선교사 묘지가 있다.

이중 특이한 무덤은 의사인 조지 윌리엄즈 박사(Dr. George Zur Williams, 우광복)의 묘이다.

영명학교 뒷동산에 잠들어 있는 우광복의 묘.
영명학교 뒷동산에 잠들어 있는 우광복의 묘.

그는 1906년부터 1940년까지 공주에서 34년간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공주의 영명중고등학교를 일구어낸 우리암(F.E.C. Williams) 선교사의 맏아들로서 1907년 4월에 제물포항 부둣가 집에서 태어났다. 14살까지 공주 영명학교에서 공부한 후에 미국의 할머니 밑에서 고등학교와 의과대학을 졸업하여 의사가 된 사람이다. 

우리암 선교사와 그의 아들 우광복 의사의 선교적 사역과 해방정국에서의 정부수립에 기여한 이들의 업적을 기리고 기념하기 위한 MOU 협정 체결을 앞두고 있어 관심을 끌고 있다.

발단은 공주와 관련이 없는 의정부CBMC(기독실업인회)로부터이었다. 우리암-우광복 선교사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일생을 바쳐 한국을 위해 희생한 이러한 분들에 대한 감사표시를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으로 한국선교유적연구회와 공주 영명동산의 선교사묘역을 비롯한 기독교 선교유적을 답사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러한 소식은 공주CBMC를 움직였고 또한 CBMC충남연합회도 가세하여 영명학원이사회와 함께 오는 9월 16일(목) 11시 공주영명중고등학교 대회의실에서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 MOU 협정체결” 행사를 갖는다. 기념사업회는 앞으로 선교사 후손찾기 및 선교사역 홍보는 물론 선교사 묘역정비 등의 기념사업을 진행할 예정이다.

우리암 선교사의 다정했던 한 때, 가운데 소년이 우광복이다.
우리암 선교사의 다정했던 한 때, 가운데 소년이 우광복이다.

광복을 염원하는 이름 ‘우광복’

윌리엄스 선교사는 아들의 이름을 ‘광복’으로 지었다. 이는 조선이 하루 빨리 일제 식민지 통치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아버지 선교사의 간절한 열망이 담긴 이름이었다. 하지만 광복이라는 이름에 ‘光復’이 아닌 ‘光福’이라는 한자를 붙였다. 이는 일제의 감시를 피하면서도 소리로는 동일한 효과를 내고자 한 윌리엄스 선교사의 지혜였다.

우광복(George Z. Williams)은 1945년 8・15광복 후에 군정을 위해 진주하는 미군의 군의관으로 그가 태어난 한국을 다시 찾았다. 군의관임에도 불구하고 군정책임자인 하지(Hodge) 사령관의 통역관 겸 특별보좌관으로 발탁되어 미군정시기의 인사 및 정책수립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국어와 영어에 능통했던 그는 미군정과 한국인들과  가교 역할을 하기 위해 남한 전역을 돌며 여론 조사를 실시하여 “당시 한국인들이 이승만을 ‘우리 대통령’이라 부르며 그의 귀국을 바라고 있다는 내용을 여러 차례 하지 사령관에게 보고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가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이승만으로 하여금 조기에 귀국해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도록 하는 데 크게 기여한 셈이다.

특히 미군정 당시 기독교인의 정부 요직 발탁에 공헌이 많았는데, 당시 기독교 인구가 국민의 2%이던 시절에 미군정의 요직에서 일할 한국인 50명을 추천하는 과정에서 70%에 해당하는 35명을 기독교인으로 추천하였던 점은 장차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부흥을 이루는데 밑거름 역할을 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에서의 짧은 시간 복무를 마친 후에 미국으로 돌아간 우광복 박사는 의과대학 교수 및 보건연구기관장으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중에 뛰어난 업적은 1930년대 중반에 흡연이 폐암을 일으키는 직접적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최초로 논문으로 밝힌 점이다.

우광복은 1994년에 87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어릴 때 뛰어놀던 한국의 그 공주영명동산, 여덟 살의 어린나이에 하늘나라로 떠난 평생 잊을 수 없던 누이동생이 묻혀있는 그 곳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하여 지금 공주영명동산의 선교사묘역에 잠들어 있다.

충남 최초의 근대학교를 세운 우리암 선교사

우광복의 아버지는 공주에서 영명학교를 세워 34년이나 교장을 지내면서 충청남도 최초의 근대학교를 세운 윌리엄스(Frank E. C. Williams, 1883-1962, 한국명 : 우리암) 선교사이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1906년 미국 덴버대학을 졸업한 후 23세 약관의 나이로 조선에 파송되어 34년간 감리교 충청 지역 선교 책임자 및 공주 영명학교 교장을 지냈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영명학당 설립이념 네가지 교훈중에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바치는 애국자를 기른다”는 내용을 두 번째로 넣을 정도로 철저히 민족교육을 시켰다. 일제의 탄압을 이겨 내면서 민족 교육을 시켜 온 결과, 충청남도의 3·1 독립운동은 그의 제자들과 그가 세운 영명학교 교사들이 주도했다.

특히 그는 1919년 4월 1일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서 있었던 유관순 일가의 비극적인 현장을 이렇게 기록하였다.

“4월 1일에 시장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 헌병이 총을 쏴 20여 명이 넘는 한국인이 사망했다. 그 가운데 세 명이 교회 사람이었는데, 한 기독교 가족의 피해는 심각했다. 부모는 모두 사망했고, 그 딸은 감옥에 가 3년 징역형에 처해졌다. 큰 아들은 공주에서 체포되어 두 어린 자식은 돌볼 사람이 없었다.”(Minutes of The Korea Annual Conference, 1919, pp.129-30)

3ㆍ1독립운동으로 유관순의 부모는 아우내 장터 만세운동 현장에서 사망하고, 이듬해 유관순이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하였으며 오빠는 감옥에 가 있는 상태가 되자 윌리암스 선교사는 유관순의 어린 두 동생을 영명학교 교감 댁에서 보호하도록 조치를 하였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1940년 말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에는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어 낯설고 물설은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는 중에 영국군에 배속되어 버마전선에 투입되어 일본군과 전투하는 광복군의 교육에도 동참하였다.

광복 후에는 맥아더 사령관의 초청을 받아 미군정 농업 고문관으로 다시 내한하여 복음 전파는 물론 우리나라의 교육과 농업 발전 및 정부 수립 등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가정적으로는 한국에서 태어난 다섯 자녀 중 두 남매를 풍토병으로 잃어 선교지에 묻어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윌리엄스 선교사는 본인은 물론 가족들의 일생과 생명을 이 땅에 바친 선교 사역을 169통의 편지로 남겼다.

이들 편지 속에는 선교사로서의 복음 전파 사역은 물론 고난과 희생의 가족사뿐 아니라 한국의 근현대 역사까지 생생하게 살아 있다.

공주대학교 총장을 역임한 서만철 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은 이들 편지들을 읽으며 느낀 감동을 “기도가 된 편지”(두란노, 2019)로 발간한 바 있다. 이 책을 통해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말씀하신 예수님의 명령만을 따라 보장된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한 생애의 전부와 자녀의 생명까지 바친 윌리엄스 선교사의 숭고한 사역들이 널리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하루빨리 일제로부터 광복을 되찾으라고 아들의 이름을 ‘광복’이라 지었던 아버지 선교사와 한국을 떠난지 반세기를 지나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한국사랑을 실천한 그 아들의 마음을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공주의 기독교 선교유적을 되돌아본다.

서 만 철 (사단법인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 010-3324-8512)

우리암-우광복 선교사 기념사업  MOU

우리암 선교사 :

△1906년(당시 23세) 부인과 함께 내한하여 충남 최초의 근대학교 공주영명중고등학교를 설립하여 많은 인재를 배출하고 1940년에 일제에 의해 추방
△인도 가지아바드 지역에서 농업학교를 설립하여 5년간 선교하며 광복군 교육에 참여
△1945년 광복 후에 맥아더 사령관의 초청으로 미군정 농업부 고문으로 취임하여 당시 한국산업의 전부이었던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함

우광복 의사 :

△1907년 4월 제물포 출생, 14살까지 공주영명학교에서 수학후에  콜로라도에서 고등학교와 의대를 마치고 의사가 됨
△1945년 광복과 함께 한국통치를 위해 진주하는 미군에 자원하여 미해군 군의관으로 한국에 옴
△미군정 책임자 하지(Hodge) 사령관의 통역관 및 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하면서 인사와 정부정책수립에 크게 기여하며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기여함

사업내용

 I 단계 : 2021. 9. ~ 2022. 12.
     기념사업회 구성, 광복 후손 찾기 및 초청행사, 선교사묘역 정비
     CBMC전국대회 주제 추진
     (한국의 기독교선교유적 UNESCO 세계유산 추진 내용의 일환)
     8.15 광복절 행사 (CTS기독교 TV 방영)

 II 단계 : 2023. 1. ~
     선교사묘역 추가 정비, 우리암 선교사 독립유공자 추서 진행
     미국의 관련 유적지 순례 (Colorado, LA), 방송특집 제작

MOU주체

의정부CBMC, 공주CBMC, 영명학원이사회,  
한국선교유적연구회, CBMC충남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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