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18751897, 캔버스에 유채, 83.8×111.8㎝, 오르세 미술관, 파리
장 프랑수아 밀레 Jean-François Millet 1814~18751897, 캔버스에 유채, 83.8×111.8㎝, 오르세 미술관, 파리

길을 가다 보면 고물상이 눈에 들어온다. 지금은 ㅇㅇ환경이나 ㅇㅇ자원으로 이름을 바꿔서 고물상이 아니다. 고물(古物, 故物)은 그냥 오래된 물건이지만 요즘은 오래되어 못 쓰게 된 것보다는 싫증나서 쓰지 않는 것, 쓸 만한데 버려진 물건, 재활용되는 것을 취급하니 환경이나 자원이라는 이름이 그 성격을 더 정확하게 표현했다.

그래도 고물상이란 말이 더 정감 있다. 도심을 벗어나 국도변 시골길 외진 곳에 높은 담을 치고 꼭꼭 숨어있다. 학교 다닐 때 조각하는 친구들과 작품재료를 찾아 가끔 들리면 그곳은 별천지였다. 높게 쌓은 탑처럼 보이는 고철더미, 파지, 병 등 나름 규칙을 지키며 모여 있다. 마치 설치 미술을 보는 듯 했다. 자동차나 기계 부속으로 짐작되는 물건에 꽤 관심이 갔었다.

내가 사는 정안면에도 몇몇 자원이 있다. 규모가 큰 곳은 크레인 같은 시설이 하늘을 배경으로 로봇의 팔처럼 펼치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한쪽에는 비닐, 맞은편에는 페트병을 압축해서 큐브 형태로 차곡차곡 쌓아 놓았고  또 다른 곳은 깡통이 압축되어 층층이 쌓여있고 한쪽은 스텐레스 주방용품더미, 골조철근더미, 샌드위치 패널 같은 건축용 재료 등등 한번 돌아보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여기 있는 재료로 뭐든지 만들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림을 안 그렸으면 고물상을 하는 내 모습을 떠 올린다. 자원을 수집하고 분류하는 일이 꽤 친환경적이고 생각한다.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1928-2019)감독의 영화 ‘이삭줍는 사람들과 나’ (The Gleaners & I, Les Glaneurs Et La Glaneuse, 2000)는 오르세 미술관에서 시작한다. 밀레의 이삭줍기로 시작해서 각종 이삭줍기 그림을 보여주며, 현재 길 위에서 줍기를 하며 사는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한다. 추수가 끝난 대지에 남아 있는 작물이나 과일을 줍는 사람, 바닷가 양식장 근처에서 조개를 줍는 사람, 도시의 쓰레기통에서 주운 음식으로 살아가는 사람,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서 재활용 작품을 만드는 사람, 곳곳에서 다양한 대상을 수집하는 사람, 환경 운동가를 만나 일기처럼 기록한다. 소비를 미덕이라 여기는 현대사회에서 주워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가난한 사람, 도시의 홈리스 등 풍요 속에 빈곤한 사람, 자발적으로 줍기를 선택한 사람을 묘사한다.
 
밀레의 그림 이삭줍기는 전면에 마치 조각상처럼 굳건하게 땅을 딛고 이삭을 줍는 세 사람이 있다. 땅에 떨어진 이삭을 줍는 의식을 하고 있는 것처럼 흔들림 없는 모습이다. 경건한 종교 의식을 행하고 있는 것 같다. 추수가 끝나고 대지에 남아있는 이삭은 그들에게 필요한 식량이다. 지금은 농촌에서 찾기 힘든 모습이다. 최근 신안군 섬의 농촌 길에 수확이 끝나고 상품성이 없어 남겨진 감자, 양파, 마늘이 밭에 덩그러니 놓인 풍경을 봤다. 당장 줍고 싶은 마음이었다. 영화처럼 줍기만으로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가을밭이다. 황금 들판에 곡식 더미가 쌓여있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과 말을 탄 사람들을 멀리 볼 수 있다. 풍경은 앞과 뒤가 대비된다.

노동을 하고 있지만 미동도 없는 조각상 같은 전면의 세 사람과
저 멀리 분주하게 움직이며 일하는 사람들.
빛을 등진 사람들과 황금색 빛을 받으며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요즘 작은 손수레에 펼친 상자와 종이 등을 앞을 볼 수 없게 잔뜩 쌓아 올리고 도로를 횡단하는 노인을 종종 본다. 도시에서 이삭을 줍는 사람들. 밀레의 그림속 앞풍경일까 아니면 뒷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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