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을 기록하는 사진. 요즈음과 같은 세상에 내 손안에 든 스마트폰으로 아이부터 어른까지 어려울 것 없이 사진을 찍는다. 그만큼 사진찍기는 매우 수월해 졌다. 그러나 모두가 어려웠던 60-70년대까지만 해도 사진기는 사진관의 전유물과도 같아 지금처럼 일상에서 사진찍기란 쉽지 않았다. 간간히 가정형편이 넉넉한 집에서만 가질 수 있는 고가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50여 년 전에도 그러한데, 일제 강점기에는 어떠했으랴. 이 대목에서 공주 사진관 역사, 그 시작이 궁금해졌다.

공주에 처음 생긴 사진관은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시대적 상황에 따라 일본인들에 의한 상권형성이 이루어 졌을 것을 감안한다면, 사진관도 마찬가지였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제강점기 사진관의 1세대라 불릴 수 있는 사진관들이 기록에서 몇 곳 나타난다. 그곳은 봉황사진관(鳳凰寫眞館), 공주사진관(公州寫眞館), 문화사진관(文化寫眞館), 그리고 중앙사진관(中央寫眞館)이다. 이 사진관들의 주인들은 모두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1920년대 신문사에 소속된 사진부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진관을 운영하였다. 1920년대는 1919년 3.1운동 이후 사이토마코토 총독이 시작한 문화통치로 조선인의 신문 발행이 허용되면서 국문으로 된 신문사들이 늘어났다. 신문사들의 활발한 취재 활동으로 사진사의 역할도 중요해 졌으며, 이때 각 신문사들은 사진사를 촉탁사진사(또는 사진기자)로 고용한 것이다.

1926년경에 이르면서 도청 앞 욱정, 즉 반죽동에 공주에 조선인이 운영하는 사진관이 다수 생기기 시작했다. 그 중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은 봉황사진관. 김봉일(金鳳鎰)이 운영하였는데, 그는 조선일보 촉탁 사진사로 활동하던 중이었다. 그는 사진관 개업기념으로 조선일보 애독자를 대상으로 파격적인 사진촬영 반값 행사를 하였다. 이러한 반값 행사는 많은 사진사들이 사진관을 개업하면서 치르는 단골 이벤트였다. 그 해에 얼마 되지 않아 동아일보 공주지국 사진반 기자였던 강병제(姜炳濟)도 공주사진관을 열었다. 그는 특히 개업을 자축하며 1926년 9월 7일부터 이틀간 공주시장에 있던 금강관에서 활동사진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수입의 실비를 제하고 잔액은 공주청년야학부에 기부하고자 하였다.

그 이듬해가 되자 도청 앞에는 또 하나의 사진관이 생겼다. 동아일보 공주지국 사진사로 활동하고 있는 문익성(文益聖)이 문화사진관을 열었다. 1927년 5월 동아일보 공주지국 사옥의 낙성식을 앞두고 문화사진관도 약 5일간 동아일보 애독자들에게 사진할인을 해 주었다. 그 후 2년 뒤 1층 사진관을 확장하면서 할인행사 이외에도 경품추첨을 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 경품에 1등 상품은 18금 짜리 손목시계이며, 2등은 18금에 루비가 들어간 반지를 2명에게나 주었다. 이외에도 만년필, 모포, 전갑, 비누, 수건 등이 있고, 기타로 454개의 카라멜도 준비되어 있었다. 사진관 확장오픈행사로 준비한 경품행사가 실로 대단하였던 듯하다.

중앙사진관 사장 김철준 씨(1938년 동아일보 게재)
중앙사진관 사장 김철준 씨(1938년 동아일보 게재)

많은 사진관들이 도청의 지척에 있었다면 중앙사진관은 도청과는 조금 떨어진 본정 공주시장 내에 있었다. 중앙사진관은 후발주자였지만, 당대 큰 이슈를 불러왔다. 그 이유는 사진관의 주인 김철준(金喆俊)이 사진을 전공한 일본유학파였기 때문이다. 1938년 5월 22일 동아일보 공주지국에서는 공주 사진업계 성공자로 당시 사진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김철준에 대해 특집 기사를 게재하였다. 김철준은 1918년 일본 후구오카의 모 학교에서 사진과를 졸업하고, 동경 마루비루 사진관 본점에서 6년간 수제사(修製師)로 활동하였다. 기술과 경험을 갖추고 1927년 공주로 돌아온 그는 처음에는 조선일보 공주지국 사진기자로 활동하였다. 그 후 1931년 2월경 시장에 중앙사진관을 열고 대대적인 할인행사를 열며 공주 곳곳에 중앙사진관을 알렸다.


그런데 사진관을 개업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2월 20일 밤 공주시장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시장의 건물 10동 18호가 전소되었는데, 이때 중앙사진관이 금강관, 중국인 상점 등과 함께 전소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공주시장 주인이었던 공주 갑부 김갑순에게 원한을 품었던 중국인들이 저지른 이 화재에는 당시 경찰순사 100여명, 공주소방조 70여명이 출동해 6시간 만에 진압할 정도의 대화재였다.

김철준은 다시 사진관을 지어 운영을 계속해 나갔다. 사진관 앞으로 새로운 길이 뚫리며 접근성도 더욱 좋아졌다. 그러다 1935년에는 사진관을 재신축하며 기념행사를 통해 더욱 알렸다. 이듬해부터는 조선일보에서 동아일보 사진반 기자로 전근하였다. 동생, 부인과 함께 사진관을 운영하던 그는 광복이후에도 계속 중앙사진관을 운영하였다. 이후 동생 김철환이 중앙사진관의 운영을 맡았는데, 그에게서 사진기술을 배웠던 제자들이 공주 곳곳에서 사진관을 운영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중 구 공주의료원 앞 삼거리에서 뉴중앙사진관을 운영하는 이덕섭씨는 김철환의 제자로 중앙사진관의 역사를 잇고 있다.

지금까지 공주에 있던 1세대 사진관의 역사를 되짚어 보았다. 많은 일본인들에 의해 지방상권도 장악되던 그 시절, 다수의 조선인들이 사진관을 운영해 왔다는 점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으로 보인다. 그 뒤, 일제 강점기에 있던 이러한 여러 사진관의 뒤를 이어 2세대 사진관들이 등장하였다. 아루스사진관, 장미사진관, 무궁화사진관, 신라사진관, 연미사진관 등이 그것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는 것이 어찌 쉬웠을까. 어떤 곳은 예식장으로 확장하기도 하고, 사진관 옆에 미용실이나 이발관을 함께 두어 운영하기도 하였다. 또 공주에는 학교가 많아 학교졸업앨범 제작도 큰 수입원이 되었을 것이다. 현재, 연미사진관을 빼고 대부분의 사진관들이 없어졌으나, 아직까지 공주사람들의 기억에 또렷이 남아있다.

작성자 : 고순영(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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