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 13

우리나라는 선진국으로서 복지강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 지금껏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특히 전쟁과 같은 국난시절이 길었던 탓에 부모 없는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란 고아들이 많아, 일찍부터 여러 자선 단체와 기관들이 복지시설을 두고 그들이 가진 인권을 누릴 수 있게 하였다. 그렇다면 국권을 상실했던 일제강점기 때는 어떻게 고아구제사업들이 이루어져 왔을까? 

본래 우리나라에 근대적 아동복지사업은 19세기 중엽 천주교 신부들에 의한 종교전파의 목적으로 위탁가정보호사업에서 시작되었으며, 이에 따라 개화기 이후 서울 종로에 천주교회 고아원과 같은 아동복지시설이 생겼다. 그 이후부터 외국인 개신교 선교사를 비롯해, 조선인, 일본인 등에 의해 고아구제에 대한 여론이 잦아지면서 전국에 많은 아동복지시설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공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는데, 주로 조선인 개인 또는 일본인에 의해 공주구제원, 계룡풍덕원, 호계풍덕원 등과 같은 곳에서 아동복지사업이 이루어졌다. 

공주에 처음 생긴 고아구제 시설은 계룡풍덕원(鷄龍豐德院)으로, 이곳을 처음으로 세우고 관리한 사람은 박인묵(朴仁黙)이요, 활성화 시킨 사람은 이한열(李漢烈) 여사, 즉 복덕월 보살이다. 박인묵은 경북 김해 출신의 자산가로, 이웃의 반가에서 노비를 학대하자 2백원을 주고 노비를 속양 시킨 것을 시작으로 빈민구제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후 공주로 넘어와 1913년 4월 부모 잃은 고아 70여명을 수용하는 시설을 두었다. 그러다 박인묵은 이 수용소를 당시 사곡면 운암리에 살던 이한열 여사에게 운영을 맡겼다. 

계룡면 중장리에 자리한 계룡풍덕원의 실황(2열 가운데 복덕월 보살) 
계룡면 중장리에 자리한 계룡풍덕원의 실황(2열 가운데 복덕월 보살) 

이 후 이한열 여사는 1917년 계룡면 중장리 갑사로 넘어가 팔상전을 중수하고 이 고아구제수용소를 계속 이어갔으며, 1929년 6월 계룡풍덕원이라 이름을 붙였다. 그곳에서는 4세 이상 18세 미만의 고아를 포함해 빈곤한 자까지 40명을 정원으로 두었으나 실제 수용자는 60명을 웃도는 등 매해 초과되었다. 원내 전임 교양사 1명을 두었고, 간이보통학교를 설치하였으며, 농업실습도 하게 하였다. 모든 경비는 복덕월 보살이 부담하였다. 그러다 1934년 12월 29일 복덕월 여사가 사망하게 되자, 그 이후에는 박인묵의 장녀 박대석(朴大石)이 당시 22살의 나이에 공주읍 본정 282번지에서 계룡풍덕원을 운영하며 구제사업을 계승해 나갔다. 

한편, 박인묵은 1914년 12월 사곡면 호계리에서 고아 및 빈곤자수용소를 설치하였는데, 그것이 호계풍덕원(虎溪豐德院)이다. 그는 그의 집 옆에 별도의 가옥을 지어 연령에 제한 없이 고아 및 불구자, 빈곤자 등을 수용소로 사용하였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글을 가르쳤으며 나이가 있는 남자에게는 농업에, 여자에게는 재봉, 세탁 등의 작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수용소는 일체 박인묵의 사비를 통해 운영 되었는데, 1926년 잠시 폐지되었다가 다시 1928년 재개 되었다. 

계룡풍덕원과 호계풍덕원이 조선인 자산가 개인에 의해 운영되었다면, 공주구제원(公州救濟院)은 일본인들에 의해 설립 운영되었다. 공주구제원은 1914년 5월 본원사(本願寺) 주지 후루사와 게세가 주도하여 설립되었다. 그는 일본 정토진종 불교 승려로 1911년 3월 공주감옥 교회사로 위촉되어 활동하던 중, 공주감옥을 복역하고 나온 출옥인 사회보호 시설인 공주관업원(公州慣業院)의 창설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던 인물이다. 

후루사와는 공주 시가지에 고아들이 밤낮으로 거리를 배회하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민가에 홀연히 들어가 도적질을 하거나, 추운 혹한기가 되면 추위를 견디고자 온돌 아궁이에 들어갔다가 화상을 입거나 불에 타 죽는 일이 빈번해 지는 것을 본 것이다. 그래서 당시 공주면에서 기류(杞柳) 즉 고리버들 재배사업을 하던 마키노 야자에몬 그리고 조선신문 충남총지사장 다우치 타케시와 함께 공주구제원을 설립하였고, 마키노가 초대 원장이 되었다. 

설립당시 공주면 금정 봉촌에 가옥 한 채를 매입해 4살부터 19살 이하의 고아 30명을 수용하였다. 이곳에서는 그리고 주로 고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겠다는 방향을 세워 그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였다. 머리 깍는 이발 기술이나 대공직 등 직업적 기술을 가르치면서도 국유림의 일부를 매입해 그들에게 개간작업을 시켜 채소, 과수, 묘목 등을 심게 하였다. 특히 원장이었던 마키노 소유의 기류농원에서 제초 및 비료살포 작업을 고아들에게 시키고 임금을 주었는데, 그 금액은 당시 구제원 경비의 과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상당하였다. 설립당시 이곳은 특별찬조원과 정회원, 일반회원을 두어 각 매월 약간의 회비를 각출하는 것으로 운영을 시작하였다. 그러다 점차 경비는 천황하사금, 관청 보조금 및 일반 유지의 기부금으로 채워졌으며, 충남도청 내무부장의 관리 하에 운영되었다. 그러다 1928년 9월 친일단체인 조선동민회(朝鮮同民會) 공주지부 경영으로 이관되어 운영되었으며, 3-40명이던 수용인원은 계속 줄어 10명도 채 되지 않게 되었다.

금정 본원사에 세워진 공주구제원의 설립자와 고아들
금정 본원사에 세워진 공주구제원의 설립자와 고아들

한편, 충남 제일 갑부인 김갑순도 욱정에 일반 고아와 걸인을 구제할 목적으로 1925년 12월 고아구제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1천원의 자금을 내며 나흘간 직접 공주시가지를 돌며, 걸식하는 고아 18명을 모집하고 광목 2필을 매수해 새 옷을 지어 입혔다. 그는 이 구제원을 영구적으로 설치하고자 공주의 각 부호에게 기부독려 하고자 통첩을 보냈는데, 이에 공주 제2갑부이자 사돈이었던 김윤환도 1천원을 내며 김갑순이 아동구제원을 홀로 운영할 수 있게 기여하였다. 약 30여 칸 규모의 건물에 많게는 3-40명씩 수용하고 연 운영비 4-5천원을 사재로 지출하였다고 한다. 김갑순은 간도시찰단이 공주에 방문하였을 때 구제원의 운영보고회를 하거나 조선일보, 조선신문 등 여러 신문에 구제원 소식을 전하는 등 자선구제활동을 수시로 선전하기도 하였다.

집필자: 고순영(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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