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로 보는 공주이야기 14

현재의 반죽교 앞에는 125년 역사를 이어온 공주우체국이 있다. 공주우체국은 우체사관제에 따라 1896년 2월 16일 대전충남지역 최초로 1등 우체사로 분류되어 ‘공주우체사’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농상공부 대신의 관할 하에 우체에 관한 일체 사무를 맡았는데, 그 중 공주우체사는 1등 우체사로 분류될 만큼 당시 중요한 지점에 해당하였다. 그 뒤 전북 군산에 이사청의 설치로 우편기능도 군산에 집중되면서 1905년 5월 군산우편국 공주출장소로 편제되었다. 그러다가 1년 후인 1906년 12월 11일 경성우편국 분국의 공주우편국으로 다시 승격되었다.

공주우편국은 처음 설립당시 중동 큰 사거리 부근의 구 국민은행 뒤편에 있었다. 그러다 도청과 주변의 여러 관공서에서 우편과 금융, 통신기능을 수요가 커지며 1913년 즉 지금의 자리인 반죽동으로 이전되었다. 

욱정으로 이전된 공주우편국
욱정으로 이전된 공주우편국

우편국의 주요 기능 중 하나는 전화신청 및 관리였다. 공주는 충남관찰부가 있던 곳으로 1905년 군사용 경비전화(警備電話) 설치 지역으로 선정되었다. 당시 공주에 수비대(혹은 헌병대)를 주둔케 하면서 군사통신을 신속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해 군용통신 전화를 설치한 것이다. 그러다 한일병합 이후 공주, 대전에 일본인 이주자가 점점 많아지자 두 지역의 우편국에 조선총독부 고시 제54호에 따라 1911년 3월 10일부터 전화교환업무가 개시되었다. 전화가입을 희망하는 사람들에게 통신전선을 설치해 주었으며, 전보도 함께 취급하였다. 당시 전화는 우편국에 근무하는 교환수가 전화가입자의 요청으로 상대방 전화선 코드에 연결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공주우편국의 전화번호는 ‘1번’ 이었다. 전화 신청 및 관리를 맡는 기관으로서 처음 시작번호가 된 것이다. 지금은 전화번호부를 잘 사용하지 않지만, 당시 경성우편국에서는 각지에서 신청한 전화번호를 받아 전화번호부를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공주에서도 전화 설치를 원하는 신청자를 받아 경성우편국에 전달하였다. 공주의 전환교환업무 개시 10년 후 전화가입자 수를 살펴보면 100명 안팎인데, 당시 경성이 3,771명, 군산이 375명 인 것을 보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주우편국 앞
사람들로 북적이는 공주우편국 앞

또, 공주우편국에서는 금융업무도 취급했다. 우편국에서는 꾸준히 저금장려 선전활동을 하였는데 금강관에서 활동사진회를 개최하기도 하고, 매주 금요일 저금과 장시일 저금을 만들어 그 판매성과가 대단하였다. 뿐만 아니라 도청소재지로서 공공기관이 많아 관인(공무원)도 많았기 때문에 관리봉급일 저금도 비상한 성적을 이루었다. 그러다 조선총독부의 예산긴축방침에 따라 공주군에서는 연회가 축소되고, 절주절연, 과소비 금지 등의 지침이 내려졌다. 결국 봉급의 1할을 강제로 공제해 우편국에 저금하게 함으로써 우편국의 예금보유액이 늘어나게 하였다.

그래도 우편국의 기본 업무는 편지나 신문과 같은 우편물의 전달이었다. 그런데 우편물의 시외배달이 잘 되지 않는 문제가 자주 발생 하였다. 1925년 1월에는 목동면 방면에 배달하는 신문이 한 달에 겨우 7-8매에 불과하다며 신문구독자들이 매우 분개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들은 우편국에 신문대금의 3분의 1을 지불하라며 우편국을 질책 하였다. 이에 공주우편국에서는 대대적인 사과를 하며 정리하였는데, 그 이후에도 또 다시 같은 일이 자주 발생해 불편함이 많았다. 

한편, 공주우편국에서는 신문이나 엽서 등의 판매도 이루어 졌다. 특히 일제강점기에는 근대문화의 선전효과를 노리고 많은 사진그림엽서들이 발행되었는데, 우편국에서 이 엽서들을 판매하기도 하였다. 1921년 4월에는 제국통신사업 창시 50년을 기념하여 사진그림엽서를 전국 각 지역 우편국에서 판매하였는데, 공주우편국에서는 그 해 4월 20일부터 정가 10전에 판매하였다.
 

공주 상징물이 새겨진 1930년대 공주우편국 인장
공주 상징물이 새겨진 1930년대 공주우편국 인장

그 뿐만 아니라 공주우편국에서는 공주의 역사 문화적 특징을 담아 제작한 특수 우편인장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사진에서와 같이 우편 소인에 앵산공원에 있던 충혼비를 비롯해 금강 배다리, 공주읍 시가지 전경, 대통사지 석조 등의 모습이 담겨 있다. 이처럼 공주를 대표하는 역사유적이나 유물, 공주 전경 등이 우편 소인에 찍혀 있어 우편물이 발송되는 타지역에 자연스럽게 공주를 선전하는 효과가 있었다.

한편, 1920년대 조선노동자의 인권보호를 위한 범사회적 노동운동이 발생할 당시 공주우편국에서도 동맹파업이 발생하였다. 1928년 2월 일본인 우편국 직원이 조선인 배달부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한 계기로 조선인 우편배달부 20여 명이 당사자인 나가노 직원을 내보내 달라고 요구하며 그렇지 않으면 동맹파업을 한다고 우편국장에게 선고한 것이다. 결국 배달부들은 파업하며 공주의 동맹파업에 일조하였다. 이러한 성장통을 겪으며 공주우편국은 현재까지 같은 자리에서 그 기능과 역할을 다하며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집필자: 고순영(공주대학교 공주학연구원 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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