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에 바닷물의 소금 이야기를 하였다. 맷돌에서 소금이 한없이 쏟아져 나와 배가 침몰하는 바람에 바닷물이 짜게 되었다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 그리고 태안 안흥 앞바다에서 건져올린 고려시대 맷돌에 대한 이야기였다. 다시 소금 이야기이다.

내포 지역의 역사적 랜드마크의 하나인 홍주성은 근년 대대적인 정비 작업이 진행중에 있다.

홍주성은 내포를 대표하는 역사유적의 하나이지만, 그러나 홍주성이 가지고 있는 역사성, 그리고 역사적 의미는 앞으로 더욱 밝혀져야 할 것이 많은 것 같다.

가령, 홍주성이 언제 축성된 것인지에 대해서도, 답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재의 실정이다. 충남 서부, 내포 지역에는 14개의 읍성이 보고되어 있다.

그 대부분이 태종, 세종 등 조선 초 15세기에 축성된 것이다. 그 축성의 배경에는 14세기 이후 왜구의 침입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이 때문에 홍주성의 축성은 왜구 침입 이후, 가장 이른 시기인 14세기 후반 고려 말에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하는 정도이다.   

홍주성의 정비를 위한 기왕의 유적 조사를 통하여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확인된 바 있다. 홍주성 내에는 이미 10세기의 이른 시기에 작은 규모의 토성이 시설되어 있었다는 것, 그리고 석성으로 만들어진 현재의 홍주성이 축성되기 이전에 비슷한 규모의 토성이 먼저 시설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련한 한 세미나에서 나는 홍주성 안에서 확인된 10세기 이른 시기의 토성 유적이 고려 초 ‘운주(運州)의 성주(城主)’ 긍준(兢俊)이라는 홍주의 유력한 호족과 연관된 시설일 것이며, 현재 홍주성과 유사한 크기의 토축(土築) 홍주성이 조성된 것은 12세기, 그리고 이를 석성으로 대대적으로 개축한 것이 14세기 후반 고려 말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안한 바 있다.  

홍주성은 고려시대 최향의 난, 왜구 침입, 이몽학의 난과 근대 동학농민혁명, 의병항쟁 등 많은 소용돌이를 겪은 역사의 현장이다. 그런데 거기에, 광해군의 고뇌가 서린 현장이 홍주성이라고 것을 추가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임진왜란 전란중에 병력의 충원, 군량의 조달 등 난국의 수습을 위해 진력하던 세자 광해군은, 1593년 연말부터 1594년 여름까지의 긴 기간을 충청도에 머물렀다. 12월 1일부터 공주에서 대략 3개월, 그리고 이듬해 2월 23일부터 8월 6일까지 거의 반년을 홍주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때 광해군은, 공주와 홍주의 어디에서 주로 머물러 있었을까. 기록으로 확인되지는 않지만, 공주에서는 공산성, 홍주에서는 홍주성이 필시 광해군이 주로 머물렀던 처소였을 것이다. 

광해군이 세자가 되기 전, 선조는 왕자들에게 시험 삼아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반찬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이 무엇이냐고. 어쩌면 식사 중의 대화였는지도 모르겠다. ‘소금이 으뜸’이라는 것이 그때 광해군의 대답이었다.

소금이 있어야 모든 음식이 맛을 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광해군은 1608년에 드디어,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1623년, 15년 만에 그 자리에서 쫓겨났다. 

소금과 같은 사람, 그리고 소금과 같은 언어가 더욱 귀하게 생각되는 요즘이다. 홍주성을 걸으며, 문득 광해군의 소금 이야기를 떠올리는 것도 무례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컬럼 원고는 충남도정신문에 게재를 거부당한 것으로서 이후 필자는 충남도정 신문 원고는 집필하지 않습니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