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지명 이야기 1

우리가 쉽게 부르는 지명 중에는 역사 속 인물의 행적들로 인해 유래된 곳들이 있다.

예를 들어 서울 ‘둔촌동’은 고려말 둔촌(遁村) 이집(李集)이 신돈의 박해를 피해 은거하였다는 데서, 대전의 ‘송촌동’은 은진송씨 가문이 자리 잡고 번성한 동족마을이라는 데서, 강원도 삼척의 ‘궁촌리’는 공양왕이 유배를 와서 살게 된 동네라 하여 유래된 지명이다.

이렇듯 우리가 매일같이 사용하는 친근한 지명 속에도 역사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특히 인물로 인해 유래된 지명을 찾다보면 일반 역사책에서는 알 수 없었던 역사 속 지역 인물들과 관련 사건이 발굴되기도 한다.

필자는 이러한 맥락에서 공주 지역에 인물로 유래된 지명을 찾아보았다.(이하 인물지명) 지명 유래 내용에 성씨, 인물이름이 등장하는 것만 대상으로 하되, 허구성 짙은 내용으로 구성된 단순 인물 지명 전설(옥황상제, 선녀, 총각 등)은 제외하였다.

주요 문헌은 우리나라 지명연구의 기본이 되는 사전『한국지명총람』과 공주지역만을 대상을 보다 세밀하게 파악한『공주지명지』이다. 공주에는 인물지명들이 있을까? 첫 번째로 백제 멸망에 관련된 인물에서 유래된 지명들을 만나본다.  

웅진동 소정이펄의 전경
웅진동 소정이펄의 전경

백제 멸망기를 배경으로 하는 인물 지명은 웅진동, 신풍면 일대에서 찾아진다. 우선 웅진동부터 살펴보자. 웅진동에는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에서 유래된 지명 ‘소정리, 소정이펄’이 전해지고 있다. 별칭으로 소정방뜰, 소정펑 등 다양한 이름으로도 불리고 있다.

지명지들에 의하면 소정리는 ‘웅진동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소정이펄이 있어서 소정이라 한다‘고 하며, 소정이 펄은 '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진을 쳤던 곳'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해당 내용이 전해지는 곳은 웅진동 일대로서 공주보를 마주하고 넓게 펼쳐진 들판이다. 여기에는 왜 이런 지명이 전해지는 것일까. 실제 소정방은 660년 나당 연합군을 이끌고 백제를 공략했으므로 역사적 정황이 뒷받침한다.

연합군에 밀린 백제는 멸망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웅진성이 있었던 공주에는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다. 소정방은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넓은 곳에 진을 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곳은 소정방펄이라고 지명은 알려주고 있다. 이 곳은 북쪽에 금강이 둘러 있고, 그 너머에 연미산이 수려하게 솟아 있으며, 동쪽에는 정지산이 둘러 있고, 남쪽에는 두리봉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있다.

서쪽에는 금강 건너 채죽산이 연미산과 나란히 서 있는 가운데의 너른 두덩이어서 그야말로 강을 낀 분지처럼 되어 있다.  


지명이 전해지는 장소 주변에는 고마나루가 있는데 백제시대에 내륙 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으로 나아가는 수로 교통의 중요한 요충지이도 했다. 즉, 소정방펄은 웅진 백제로 들어오는 관문 같은 곳이었다.

기록에는 당나라 소정방의 13만 수륙군이 바다를 넘어 백제를 치기 위해 넘어왔다고 전한다. 백제 군사들은 강 입구에서 철저히 저항했지만, 쓰러지고 말았고 소정방이 공주에 설치한 웅진도독부는 676년(문무왕 16) 당나라 군대가 철수하기 전까지 약 16년간 존속되었다.

당시 금강을 통해 웅진 땅에 내린 당나라 군사의 말발굽 소리, 비명과 함성이 교차했던 그 날의 기억은 역사책 말고도 지명에 고스란히 남았던 것이다.  

엄대암 모습, 신풍면 용수리 가락골에 위치한다.
엄대암 모습, 신풍면 용수리 가락골에 위치한다.

또 다른 백제 멸망기 인물이 담긴 지명은 신풍면에 있다. ‘엄대암’ 이라 불리는 곳으로서 백제 멸망기 엄장군이란 인물이 등장한다. 지명 유래에 따르면 신풍면 대룡리에는 엄대장이란 장군이 살고 있었는데 힘이 장사였고, 무술에 뛰어났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쳐들어왔을 때 엄대장은 당나라 군사를 수 차례 물리치며 저항했다. 그러나 숫자로 우세한 나당 연합군에 무너지는 백제를 보고 늙은 자기 몸을 한탄하며 고향으로 돌아와 한탄 속에서 병들어 죽었다.

죽기 전 본인의 무기와 싸움 비법을 적은 것을 마을의 큰 바위에 감추고 자손들에게 나라가 위급해지면 저 바위가 스스로 열릴 것이니 그때 쓰인 대로 하면 적을 물리 칠 수 있을 것이라 유언했다고 한다.

몇백 년 뒤 자손들이 석공을 시켜 억지로 바위를 깨보려 하자 갑자기 마른하늘에서 번개가 쳐 모두 놀라 도망을 가기도 했다. 그 후 엄대암이라 불리게 된 바위는 한 번도 열리지 않았고, 사람들도 누구 하나 엄대암을 건드리지 못한다고 한다. 


엄대암 지명은 1992년에 발간된 『공주의 맥』에 최초로 등장한 후 1997년 『공주지명지』에도 수록되었지만 구체적인 장소에 대해서는 기록된 바가 바가 없었다.

최근 필자의 현지 조사에 따르면 마을의 노인들은(제보자 엄재용) 엄장군 바위의 존재를 알고 있으나, 바위는 대룡리에서 바로 인접한 용수리에 있었다.

사실 구체적인 위치보다 더 주목해야할 사실은 왜 이 일대에 백제 멸망과 관련된 인물 지명이 존재하는 가이다.   

엄대암 지명이 전해지는 신풍면은 백제시대 때 벌음지현(伐音支縣), 무부현(武夫縣)으로 불린 역사의 연원이 깊은 곳이다. 신라 경덕왕이 청음현으로 고치기 전까지 백제의 속현으로 존재했다.

바위가 있는 용수리는 백제 벌음지현 치소 산정리에 근접해 있고, 백제의 부흥 운동이 3년간이나 치열하게 진행된 예산 대흥과 가깝다. 또한 백제시대로 추정되는 신풍산성도 근처에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합해 보면 백제멸망과 관련된 지명이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정도이다. 엄장군이라는 인물은 지명 외에는 전혀 알려진 바 없지만 허구의 인물이라고만 볼 수도 없다.

다만, 추정해보건대 이 지역 출신의 인물로서 백제 멸망기 함락되는 나라를 안타깝게 바라봤던 장수이거나, 연합군과의 전쟁에 패해 이 일대에 몸을 숨기면서 백제 부흥 운동에 참여했던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지명도 처음에는 다 그렇게 불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므로, 당시 이를 지켜본 지역민들은 엄장군의 특별함과 백제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면서 그 장소를 엄장군 바위, 엄대암이라 부르게 된 것은 아닐까.

즉, 단순 지명인 것 같아도 백제의 수도였던 공주의 역사적 특수성, 그리고 지명이 존재하는 장소가 가지는 역사지리적 특성을 알고 엄장군에 대한 지명을 다시 보면 그 가치와 의미는 풍부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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