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1. 무령왕이 즉위하고, 백가가 금강에 던져지다

역사상 금강의 전성기는 475년부터 663년까지의 188년, 금강변에 백제 왕도가 위치했던 약 2백 년의 기간이다.

475년 가을 10월(음력) 문주는 고구려군의 무차별 공격에서 살아남은 한성의 귀족, 사람들과 함께 웅진으로 내려왔다. 많은 사람과 짐을  한꺼번에 배에 싣고 움직인 대이동이었다.

어떤 이는 그때 문주왕이 웅진까지 오는데 육로를 이용하였다고 하지만,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한강을 빠져 나온 그 배는 서해 안흥과 보령 앞바다를 지나 다시 금강을 한참 거슬러서 올라왔다.

도성이 바다에 가까우면 그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웅진은 항해가 가능한 금강의 종점이었다. 그것이 천도지 웅진이 갖는 조건의 중요한 포인트였으며, 그것은 금강의 역사에서 가장 많은 이동이 한꺼번에 이루어진 사건이기도 하였다.   

475년 이후 부여로 천도하기까지 63년 웅진도읍기에 있었던 가장 충격적 사건은 역시 501년 연말 동성왕의 갑작스러운 암살, 그리고 이로 인한 무령왕의 즉위일 것이다. 그것은 유신시대를 종식시킨 1979년 연말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것이기도 하다.

즉위한 무령왕은 이듬해 502년 정월 동성왕 시해의 주범인  백가를 단호하게 목 베고, 그 시신을 백강(금강) 물에 던져 넣었다. 그것이 무령왕의 정치적 출발선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무령왕의 시대는 502년 정월, 금강(백강)에서의 그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서기 501년 백제 25대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그해 겨울 11월 부여 서쪽 마포촌(서천군)에서 자객의 칼을 맞고, 세상을 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즉위한 무령왕은 다음해(502) 정월, 가림성(加林城)의 백가를 쳤다.

백가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으로 가서 한솔(扞率) 해명(解明)을 시켜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백가는 성에서 나와 항복하였다. 왕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에 던졌다”고 하였다. 백가가 적극적 반격을 도모하지 않았다는 것이 주목된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은 백가에 대한 무령왕의 조치가 지연된 점을 비판하는 의견을 달았다.

“백가와 같은 극악한 역적은 천하에 용납될 수 없는데 즉시 처단하지 않고 이때에 와서 그가 스스로 죄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반역을 일으킨 후에야 처단하였으니 늦은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재윤은 백가가 웅진성에 들어오지 않고 가림성에 계속 머물렀던 것을 주목하여 백가가 정변의 몸통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였다. 동성왕의 죽음, 그 배후에 무령왕이 있었으리라는 추측인 것이다.
  

동성왕의 명으로 백가가 축성한 가림성(부여)의 토축
동성왕의 명으로 백가가 축성한 가림성(부여)의 토축

가림성의 백가를 치기 위하여 무령왕은 웅진성에서 출발하여 가림성을 향하였고, 중도에 우두성(牛頭城)에 진을 쳤다. 그리고 한솔 해명을 가림성으로 보냈다. 이 무령왕의 군사 거점이 되었던 우두성이 어디였나에 대해서 심정보는 그것이 부소산성일 것으로 추정하였다.

가림성을 압박하는 차원에서 주둔한 곳이 우두성이었음을 생각하면 우두성이 부소산성일 가능성은 많다고 생각된다. 우두성은 486년(동성왕 8) 7월 웅진성의 궁실을 중수하는 작업과 같은 시기 축성한 것이다.

천도 이후 11년 만의 일인데, 그로부터 다시 15년 뒤인 501년 가림성의 축성이 이루어진 셈이다. 23년을 재위한 동성왕의 가장 큰 업적은 웅진 도성을 건설하고 정비한 일이었다. 

원래 웅진의 도심은 우기가 되면 수침되는 지역이어서 도시 건설이 쉽지 않은 조건이었다. 또 도성의 건설이란 도성만이 아니고 이를 방비할 수 있는 시설까지를 함께 아울러서 작업이 이루어진다. 방어시설의 근간은 금강의 뱃길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동성왕이 486년 우두성을 축성하고, 501년 가림성을 축성한 일은 바로 금강 수로의 방어시설을 정비함으로써 도성의 방어 체제를 완성하는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동성왕은 웅진도성의 건설과 정비만이 아니고, 금강변에 도성 방어를 위한 군사시설의 기본을 정비하는 업적을 남긴 셈이다.  

502년 무령왕이 가림성의 백가를 치기 위해 나섰을 때, 아마도 그 군사들은 웅진에서 금강을 이용하는 선편으로 우두성까지 이동하였을 것이다. 백가가 항복하여 처단된 지점이 어디인지는 다소 불명하지만, 우두성이 아닐까 한다.

그렇다면, 백가의 시신이 던져진 ‘백강’은 백마강이 되는 셈이다. 동성왕대 구축된 금강변의 두 성, 우두성과 가림성의 전략적 가치와 중요성은 무령왕대에 확인되고, 이후 사비도성이라는 새로운 도성의 건설로 이어지는 디딤돌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공주의 민속학자 이걸재는 공주 시내에서 멀지 않은 금강변 우성면 소재 사마산(높이 308m)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설을 채록하여 소개하였다.

“옛날, 나라에 난리가 나서 적군들에게 공주(웅진)를 빼앗겼는데 하늘에서 내려준 장수가 배에 군졸을 데리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와 사마산에 진을 쳤다. 사마산의 중턱에는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어서 장수 막사를 그 앞에 치고 병사를 돌보며 공주를 관찰했다. 그리고 배에 병사를 태우고 공주로 가서 난리를 평정했다.” 금강변 사마산에 있던 사마장군이 배에 병사를 태우고 웅진 도성에서 일어난 난리를 평정했다는 이야기는 무령왕의 즉위와 맥이 닿는 전설이다. 장군의 이름이 ‘사마’라는 것이 더욱 흥미 있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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