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2. 무왕, 백마강을 백제의 ‘국가정원’으로 만들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의 로맨스로 널리 알려진 무왕(재위 600-641)은 익산에 미륵사를 짓고 백제의 국력과 기술을 과시한 인물이다.

미륵사라는 대규모 토목 건축 사업을 벌인 인물로서, 40여 년이라는 긴 기간 왕위에 있었고, 사비 도성의 경관지인 백마강에 대해서도 특별한 애정을 가졌던 인물이다.  

무왕은 서기 600년에 즉위하였다. 사비 천도 이후 60년 이상이나 지난 때여서 도성은 이미 오래전 완비된 상태였다. 이 때문에 미륵사를 건설하고 익산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유도 있었던 것이다.

무왕이 특별히 관심을 가졌던 공간의 하나는 백마강이었다. 우선 백마강 건너편에 있는 왕흥사를 완성시켰다. 무왕 35년(634) 2월의 '삼국사기' 기록이 그 내용을 전하고 있다.

“그 절은 강 가에 있었으며, 채색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하였다. 왕이 매번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다음 3월에는 “대궐 남쪽에 못을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방장선산(方丈仙山)을 모방하여 섬을 쌓았다”고 하였다.

연못의 물을 ‘20여 리 밖’에서 끌어왔다면 그 물은 물론 백마강 물을 끌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왕이 뱃놀이를 즐겼던 낙화암 부근의 백마강 풍경
무왕이 뱃놀이를 즐겼던 낙화암 부근의 백마강 풍경

무왕 37년(636) 3월의 기록에는 왕이 대왕포에서 술마시고 노래하며 즐기는 연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왕이 측근 신하들을 데리고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중략)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하여, 북치고 백제금(百濟琴)을 키면서 노래를 부르자 수행한 사람들도 여러 번 춤을 추었다.”

이것은 백마강을 선유(船遊) 하면서 벌어진 잔치의 모습이다. 그리고 이것이 처음이거나 유일한 잔치였다고 볼 수도 없다. 무왕은 백마강에서의 선유와 잔치를 무척 즐겼던 것이다. 선유 잔치의 현장은 ‘사비하의 북쪽’에 있는 ‘대왕포’라고 하였다.

대왕포의 경관에 대해서는 “포구 양쪽 언덕에 기암 괴석이 서 있고, 그 사이에 진기한 화초가 있어 마치 그림 같았다”고 하였다.

백마강의 제일 명승 경관지가 부소산의 낙화암 일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있는” 곳은 역시 낙화암 일대의 백마강변일 것이다.    

백제의 왕들이 대체로 음주를 즐겼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서기 500년 웅진시대의 동성왕은 금강변에 임류각(臨流閣)을 완성한 후, 측근들과 함께 ‘종야극환(終夜極歡)’, ‘밤새 끝내주게 놀았다’고 한다.

야밤에 과도한 음주 행위가 수반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임류각 앞에는 연못을 파고 기화요초를 심었는데, ‘임류각’이라는 이름으로 보면 그 건물은 금강에 면하여, 강변에 지어진 건물임에 틀림이 없다.

무왕은 망해루(望海樓)라는 건물에서도 잔치를 베풀었다. 망해루에서는 바다는 보이지 않아도 백마강은 바라보이는 위치였을 것이다. 또 큰 연못(大池)에 배를 띄우고 궁중의 여성(嬪御)들과 함께 놀기도 하였다. 

2022년 백마강변은 ‘국가정원’으로 개발되고 있다. 그 국가정원 차원의 백마강에 대한 관심은 근년의 일이 아니고, 1400년 전 백제, 특히 무왕이 보여준 아이디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무왕은 사비도성의 궁궐을 수리하느라고, 한참을 웅진의 궁실에 거처하기도 하였던 인물이다. 2월에 웅진으로 와서 7월에 사비로 복귀하였는데,  

서기 630년의 일이다. 적어도 이 무렵까지는 익산의 별궁이 지어지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때의 이동로가 금강이었을 것임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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