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지명 이야기 2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천년고찰 동학사. 사찰로 올라가는 길은 봄이면 벚꽃, 가을이면 단풍이 사시사철 사람들을 반긴다.

그런데 그 길에는 꽃과 나무에 취해 자칫하면 놓칠 슬픈 역사를 간직한 지명이 있다.

바로 ‘울바위, 자작바위’라 불리는 곳이다. 조상들이 바위에 이름을 붙여 부르는 일은 흔하지만 이 바위들 유래에는 조금 특별한 사연이 있다.

계유정난에 얽힌 단종과 세조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우선 각각 지명 유래 내용을 보자. 울바위는 “마당만 한 큰 바위가 길가에 있는데, 세조가 동학사에 들렀다가 단종대왕과 자기 때문에 죽은 선비들의 초혼각에 참배하였다.

돌아가는 길에 후회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이 바위에서 크게 울고 통곡을 하며 자기의 잘못을 뉘우쳤다."라는 유래담이 전하고(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자작바위는 “세조가 이 근처에서 차마 떠나지 못하고 발길을 자작거리면서 뒤를 돌아봤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한국지명총람) 전설만으로 보면 세조가 마치 이곳을 다녀간 듯이 생생하다. 그런데 왜 공주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같은 그들의 이야기가 지명에 남아 있는 것일까?                         

동학사 입구에 있는 울바위(좌)와 자작바위(우) - 출처 : 국립공원 계룡산 아카이브(좌) 및 필자 촬영(우)
동학사 입구에 있는 울바위(좌)와 자작바위(우) - 출처 : 국립공원 계룡산 아카이브(좌) 및 필자 촬영(우)

유래를 이해하려면 단종의 삶을 비극으로 이끌었던 세조의 계유정난, 그리고 김시습과 얽힌 동학사를 주목해야 한다. 동학사는 불자들이나 계룡산을 찾은 관광객들이 필수로 거쳐 가는 유명 사찰이다.

그런데 동학사 초입에 단종과 사육신 등 계유정난의 희생자들을 기리는 유교식 제사공간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지금은 숙모전이라 불리는 이곳의 원래 이름은 초혼각. 맨 처음 김시습이 단종의 제사를 지내며 시작되었다.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 사람이자, 한국 최초의 한문 소설 금오신화를 지은 인물이다. 그는 세조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세상을 떠돌며 은둔했는데, 1457년 단종이 영월 청령포에서 외롭게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 동학사로 와 작은 단을 쌓고 통곡하며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작게 쌓아 올린 단으로 시작되었겠지만 이후 난에 희생된 사육신 등의 위패를 추가하였고, 번듯한 각을 지어 제사를 공식 해 오면서 절의의 공간으로 전승되었다.

영조 대에 불에 타 다시 건물을 세우고, 20세기 들어서 숙모전으로 이름을 바뀌었음에도 당초 처음 단을 쌓았던 초혼각터는 여전히 그 의미가 남다르다.

김시습이 처음 단을 쌓았던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단종이 죽은 음력 10월 24일에 제향을 하고 있으니 역사의 이면을 마주하는 듯 비장함 마저도 느껴진다.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의 자리에 오른 세조는 하루도 편안히 보낼 수 없었다. 야사에 따르면 세조가 단종을 유배시킨 후 꿈을 꾸었는데 단종의 모친 현덕왕후 권씨(세조의 형수)가 나타나, 매우 분노하면서 “네가 죄 없는 내 자식을 죽였으니 나도 네 자식을 죽이겠다.”하였다고 한다.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요절하게 되자, 저주 때문이라 생각한 세조는 현덕왕후의 고명과 책보 · 장구 등을 묻어버렸다고도 한다.

물론 사실과 정확히 부합되는 내용은 아니지만 실제 세조는 현덕왕후의 능을 파헤치기도 할 정도로 혼령에 시달렸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왕이 된 후 불면증, 흉통, 피부병 등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도 어려움을 호소했음이 실록에도 자세하다.

그렇다면 과연 세조는 단종의 혼을 모신 동학사 초혼각에 왔던 것일까. 지명만으로 역사적 사실을 추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후 조정에서 단종을 비롯한 안평대군, 황보인, 김종서 등의 280명 위패를 모시고 영혼을 위로하라며 초혼각을 건립해주었고, 세조는 직접 280명의 명부를 비단에 써줬다고도 한다.

뒤늦게나마 단종의 죽음에 슬픔을 느꼈던 것일까. 자작바위와 울바위는 말이 없지만 당시 세조가 동학사 인근에 왔었을 가능성과 이를 바라본 당시 민중의 분위기만큼은 추리해 볼 수 있다. 

한편, 김시습과 세조의 인연은 동학사에서 마곡사로도 이어진다. 김시습이 마곡사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세조가 찾아왔다고 하는데, 정작 김시습은 만나지 못하고 영산전의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하며, 당시 타고 왔다는 가마가 보존되어 현재 충청남도 민속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까지도 마곡사 인근에는 세조와 관련된 지명들이 전하고 있기도 하다.  

대부분의 이들은 공주 동학사와 마곡사를 불교사찰로만 눈여겨보고 간다. 그 이면에 묻혀진 단종의 슬픔과 김시습의 통곡, 왕이 되었지만 비애로 가득 찼을 세조의 마음도 읽어보자.

모든 것이 기록으로 남을 수 없다. 어떤 것은 역사가 되고 어떤 것은 우리 곁의 전설로 남아 떠돌고 있으니 우리 곁의 소소한 이야기로 역사를 이해하면 더 즐겁게 배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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