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3. 금강에 서린 의자왕의 기쁨과 슬픔

의자왕은 31대, 백제의 마지막 임금이다. 젊어서는 ‘해동의 증자’ 효자로 이름을 날렸고, 신라와 가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여 백제의 이름을 드높였지만, 백제 멸망이라는 비극의 주인공이 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재위 20년간 금강과 여러 가지 인연을 맺었던 임금이기도 하다. 

의자왕에게 있어서 금강은 여러 모습의 장면이 있다. 첫째는 잔치를 즐기는 연회장으로서의 금강, 둘째는 당군의 침입을 봉쇄해야 하는 군사 전략지로서의 금강, 셋째는 사비성 함락을 전후하여 피란을 가고 잡혀오는 치욕의 금강, 넷째는 망국 백제의 산하를 뒤로하고 낙양으로 끌려가던 이별의 현장으로서의 금강이 그것이다.

부소산이 있는 백마강은 의자왕에게 있어서도 선호하던 연회의 무대였다. 의자왕은 “궁녀와 더불어 황음탐락하여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의자왕 16년 3월)는데 아마도 그 공간은 이미 무왕이 즐겼던 대왕포를 중심으로 하는 백마강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의자왕은 대왕포 일대만이 아니고, 논산 지역으로까지 놀이 공간이 확대된 것으로 보인다. 희녀대(부여읍 현북리), 궁골(석성면 우곤리), 황화산(논산시 등화동), 채운산(강경읍) 등에 대한 이야기가 이점을 암시한다.

의자왕대 건립으로 추측되는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강경의 옥녀봉에서 석재를 떠간 것이라는 것도 백마강만이 아니라 강경의 강까지 앞마당처럼 이용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한다.     

상상하지 못했던 당군의 백제 침입이 현실화하자, 금강은 이들의 침입을 차단해야 하는 전략적 지점이 된다. 금강 하구에서 이들을 선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이 공통적 의견이었다. 이에 따라 백제군은 금강 하구를 막았으나 13만 2천 척에 이르는 나당군의 대공세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비성 함락을 목전에 둔 660년 7월 13일 의자왕은 태자 부여륭과 함께 웅진성으로 몸을 피하였다. 필시 북포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거슬러 웅진성에 이르렀을 것이다. 웅진성은 무왕 때도 사비 궁궐을 수리할 때 반 년이나 왕이 머물렀던 곳이고, 방어의 요건이 사비성에 비하여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미 저울추가 기울고 난 다음이라, 방어상의 지리적 우열 정도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웅진성의 방령 예식진의 배신은 이러한 점에서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였다. 7월 18일, 예씨의 전리품으로 다시 사비로 붙잡혀오는 의자왕에게 있어서, 금강은 이제 예전의 금강이 아니었다.   

8월 2일 사비도성에서는 나당연합군이 ‘전승’을 축하하는 성대한 연회가 개최되었다. 지금까지 사비도성에서 열린 연회의 주인공은 항상 의자왕이었다. 그러나 이제 잔치의 주인공은 백제를 멸망시킨 적국 당나라의 장군, 그리고 신라의 왕이었다.

축하연의 하이라이트는 의자왕이 적국의 무열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술잔을 올리는 일이었다. 있을 수 없는, 그리고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그것으로 의자왕이 사비도성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모두 끝이었다. 남은 것은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을 끝내는가였다. 그리고 그것 역시 의자왕의 일은 아니었다.  

유왕산에서 바라본 금강(계룡산이 지척인 것처럼 보인다)
유왕산에서 바라본 금강(계룡산이 지척인 것처럼 보인다)

백제 각처에서 백제를 다시 회복시키려는 열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전쟁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 ‘백제 부흥’의 열기 때문에, 의자왕을 빨리 백제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이 당으로서는 우선적으로 필요한 조치였다. 의자왕을 실은 배는 산동반도를 향하여 구드래를 출발하였다. 음력 9월 3일의 일이었다.

배가 양화면의 유왕산 앞을 지나갈 무렵 많은 백성들이 이 산에 모여 통곡하며 배웅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때 의자왕이 잠시 머물렀던 곳이어서, ‘유왕산(留王山)’이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것이다.

왕이 배를 멈추고 머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이 유왕산에 모여 떠나가는 의자왕의 배를 바라보았다는 것은 아마도 사실일 것이다. 부근 사당산(원당리)에는 백제군이 의자왕을 구하기 위하여 활을 쏘며 저항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고, 미처 유왕산에 이를 수 없었던 사람들이 멀리서 의자왕을 배웅했다는 ‘망배산’도 있다.

결국 유왕산은 의자왕이 잠깐 머문 곳이 아니라, 백제 사람들이 왕을 자신의 마음에 머물게한 곳이었던 셈이다. 모두 망국 백제, 의자왕의 슬픔을 전하는 이야기이다. 의자왕은 그해 연말 낙양에서 바로 사망하여 북망산에 묻혔다. 그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의자왕 살해사건’이라는 소설이 가능했을 것이다. 

의자왕은 비극의 인물이다. 비극의 인물인 것은 물론이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불운한’ 왕이라고 동정표를 던지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개인적인 감상은 자유로운 것이지만, 역사적 평가가 그렇기는 어렵다.

7백 년 백제가 허무하게 무너진 데는 왕의 잘못과 책임이 없을 수 없다. 백마강에서의 잦은 연회가 잘못이 아니라, 대외전략과 외교에서의 확실한 실패가 뼈아픈 과오였다. 그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역사를 통하여 교훈을 얻고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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