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4. 민중의 생활 터전으로서의 금강 

백제가 멸망하자 금강은 이제 예전의 금강은 아니었다. 왕도는 멀리 동쪽 경상도의 땅 끝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는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잔치를 즐기는 정치적 무대, 도성을 치기 위하여 대륙의 13만군이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긴박한 현장이 될 위험성은 없었다.

세곡이나 생활에 필요한 각종의 물자가 유통하고, 인걸이 이동하는 교통로로서의 기능이 더욱 중요하게 되었는데, 강변의 사람들에게는 먹을거리를 공급받는 각종 수자원의 생산 기능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웅천주 판적향에 거주하던 향덕이 경주의 신라 임금 경덕왕으로부터 특별한 포상을 받은 것은 755년(경덕왕 14)의 일이었다. 그는 부모 공양을 위하여 자기 넓적다리 살을 베어드리고, 어머니의 종기를 입으로 빨아 치료했던 효자로 유명한 인물이다.

판적향은 공주 시내에서 가까운 강변의 마을이었는데, 향덕의 일상 중의 하나가 마을 앞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아 봉양하는 일이었다는 것은 많이 잊혀진 이야기이다. 살을 베어 상처가 아물지도 않은 채로 물에 들어갔다가 피가 흐르는 바람에 그 내가 ’혈흔천(血痕川, 혹은 血流川)‘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혈흔천은 공주시 신기동과 소학동 마을 앞을 북으로 흘러서 금강 본류와 합류한다. 금강의 본류에 가까운 지천(支川)의 하나인 것이다. 내와 강은 강변의 사람들에게 질 높은 식량을 공급하는 또 다른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공주 우성면 사마산 부근 금강 풍경
공주 우성면 사마산 부근 금강 풍경

민속연구가 이걸재는 근년 우성면 어천리, 죽당리, 오동리의 금강변 마을에 대해서, 이제는 잊혀진 많은 기억들을 채집, 정리하여 놓았다. 이 책에 의하면 대략 50년 전까지 나룻배와 어선, 사업선, 농선(農船)들이 운행 되었는데, 그때 죽당리는 12척, 오동리는 9척의 배를 가지고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주변 금강의 여러 마을 중에서 가장 많은 수량이다. 어업을 전업으로 할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는데, 어천리에서는 잉어, 메기, 가물치, 붕어, 동서, 새우, 칠어, 숭어, 장어, 게 등이 잡혔고, 오동리에서는 참게, 변대, 칠어, 잉어, 메기, 가물치, 숭어, 동서, 장어, 붕어, 새우, 참게, 모래무지, 갈가리, 미꾸리, 빠가사리, 쏘가리 등이 잡혔다고 한다.

어천리 사람들이 메기, 가물치, 장어 등 검은 것을 좋아했던 반면, 오동리에서는 붕어, 잉어와 같은 흰물고기를 좋아했다는 것이다. 

물고기를 잡는 방법에 대해서도 다양하게 자료를 정리해 놓았다. 강살 어로는 나뭇가지와 말뚝으로 발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것인데 ’강살‘을 매는 방법은 강을 가로지르는 형태, V자 형으로 살을 치고 고기 함정을 만드는 형태, L자 형으로 살을 치고 입구에서 끌이그물로 잡는 형태 등이 있었다.

낚시 어로는 주낙과 대낙이 있다. 민물 참게를 잡기 위해서는 수수 이삭을 이용하여 잡기도 하고, 지천에 발을 설치하여 잡기도 하였다. 장어는 후리작살이라는 장어 전용 작살이 있었다.

그물이 보급되면서 ’명지그물‘이라 불리는 그물이 사용되고, 선주가 7-8인 사람들을 고용해서 전문적으로 강 어업을 하는 직업군까지 발생하였다. 싸리나무로 만든 통발과 가리, 삼태미 긁게, 작살 등은 어로에 이용되는 개인 장비였다.   

어천리와 오동리 중간의 죽당리는 한때는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었고, 죽당리 새나루에는 나룻배와 농선, 어선을 만들고 수리하는 조선소까지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임천군(부여)에 수어(水魚), 민어(民魚), 잉어(鯉魚), 한산군(서천)에는 백어(白魚), 홍어(洪魚), 상어(沙魚), 부여현에는 잉어(鯉魚), 웅어(雄魚) 등의 물고기가 특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웅어(雄魚)는 부여에서 지금도 유명한 ’우여‘를 가리킨다. 바닷물과 민물이 교차하는 금강 하구에서 주로 봄에 잡히는 어종이다. 이 우여는 백제 의자왕이 즐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소정방이 먹고 싶어 했지만 우여들이 모두 물 밑으로 피신해 맛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무령왕릉 출토 자료 중에 은어의 뼈가 있다는 것은 금강의 기능이 실제로 매우 다양한 것이었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 은어는 당연히 금강의 물고기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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