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5. 이도, 금강을 터전으로 고려 공신이 되다 

이도는 전의 이씨(全義李氏)의 시조이다. 전의 이씨의 시조 이도(李棹)에 대해서는 15세기의 자료인 『신증동국여지승람』(전의현)에 “태조(왕건)가 남쪽을 정벌하러 금강에 이르렀는데 물이 넘치므로 도(李棹)가 보호하여 건너는 공이 있었다. 이에 이름을 내려 ‘도’라 하고 벼슬이 태사 삼중대광에 이르렀다.”고 소개되어 있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그의 원래 이름은 ‘치(齒)’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태조 왕건이 건넜다는 ‘금강’은 공주의 금강을 지칭하는 것이다. 왕건으로부터 하사받은 그의 이름 ‘도(棹)’의 글자 뜻은 배의 운항에 사용하는 기구인 ‘노’를 의미한다. 즉 동력선이 없는 옛날에 인력으로 저어 배를 전진하게 하는 노를 가리키는 것이다. 태사공 이도가 왕건을 호위하여 때마침 물이 넘치는 금강을 건너게 함으로써, 고려는 후백제를 물리치고 마침내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도가 고려 공신으로 이름이 드러난 것은 10세기 고려의 후삼국 통일전쟁 때의 일이지만, 그 선대는 아마 대대로 공주, 금강변에서 터를 잡고 살던 집안이었을 것이다. 통일신라기 ‘주호(朱昊)’라는 중국의 승려가 공주에 이르렀다가 ‘이방이(李芳伊)’라는 사공의 효행과 적덕에 감동하여 명당을 점지하여 주었다는 전설이 이 점을 암시한다. 그 무덤이 ‘목 마른 용이 물을 먹는다(渴龍飮水)’는 풍수 지형으로서 그 덕에 이도와 같은 인물이 배출되었다는 것이다.

전설적이기는 하지만 ‘이방이(李芳伊)’라는 인물은 이도의 선대에 해당한다. 공주시 신관동 이도 선대 묘소가 있는 이산(李山)의 기슭에 전의이씨 재실이 있다. 구전의 내용이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묘소의 점지와 관련한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오래전에 채록된 바 있다. 

“어느날의 일이었다. 사공이 배를 띄워 집으로 돌아오는 도중 이름을 알 수 없는 한 노인이 영은사에서 나와 그를 불러 세우는 것이었다. 사공은 가는 도중인데도 불구하고 급히 배를 돌려 노인을 태우고 다시 강을 건너가는데, 노인이 말하기를 잊어버린 물건이 있어서 다시 탔던 데로 돌아가 달라는 것이었다. 사공은 마음씨 좋게 그렇게 하였다. 이러기를 서너 번, 노인이 말하기를 당신은 아주 가난하게 보이지만 마음은 바른 사람이다. 나는 당신을 위하여 가족 자손을 위하는 것을 가르쳐 주겠다. 바로 저기 보이는 높은 산을 올라 침을 보면 아까 장소를 향하게 하고 당신이 죽으면 거기에 묘를 쓰도록 하라고 하였다. (중략) 그 후 사공이 죽었는데 그곳을 묘소로 정하였다.” (공주고보동창회, '충남향토지', 1935)  

이산(李山)은 공주시 신관동의 공주대교가 내려다보이는 금강변의 다소 가파른 야산이다. 홍수통제소 뒷산, 장군산의 맥이 흘러 금강에 닿는 곳에 전의 이씨 시조 선대의 묘소가 위치한다. 

금강의 이도(李棹)는 태조 왕건에 의하여 ‘도’라는 이름과 함께 공신호를 받고 ‘태사 삼중대광’에 임명되었다고 한다. 조선 초에 만들어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러한 사실이 언급되어 있는 것을 보면, 그 역사적 사실로서의 가능성은 매우 높다. 문제는 태사공 이도가 태조 왕건과 언제 만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앞의 기록은 태조(왕건)가 “남쪽을 정벌하러 금강에 이르렀을” 때였다고 한다. 여기에서 왕건이 ‘정벌’하려 했다는 ‘남쪽’은 물론 전주를 도읍으로 삼고 있던 후백제를 지칭하는 것이다.

고려 공신 이도의 선대 묘소가 자리한 금강변의 이산(李山)
고려 공신 이도의 선대 묘소가 자리한 금강변의 이산(李山)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는데 금강의 물이 넘쳐 난관에 봉착하였을 때, 이 문제를 해결한 인물이 이도라고 한다. 금강은 여름이 되면 홍수로 물이 넘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따라서 ‘물이 넘치는’ 문제의 발생 시기는 음력으로 6, 7월 경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연대는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고려사'에 이도의 행적을 입증할 자료가 보이지 않을 뿐 아니라, 936년 왕건은 금강을 건너지 않고 경상도 선산으로 우회하여 신검군과 일전을 치른 후 논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도의 고려 왕건에 대한 협력은 936년 후백제 공격시의 일이 아니라 그 직전 935년 경, 후백제와의 본격적 대결을 위한 준비 단계에서의 협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전주에 거점을 둔 후백제를 금강을 건너 직공할 것처럼 고려군이 그때 교란 작전을 펼쳤던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