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7. 금강의 강변에 살다, 이경여와 이중환

금강은 예로부터 선비들의 알려진 유람지이기도 하고, 몸을 의탁하는 세거지로서도 주목되었다. 부여 백마강변 진변리에 부산(浮山)이 있고 백강마을이 있다. 17세기 인조, 효종대의 문신 백강(白江) 이경여(李敬輿, 1585-1657)가 살았던 마을이다.

이경여는 전주 이씨로 세종의 7대손이며, 서울에서 출생하여 우의정, 영의정까지 지낸 당대의 비중 있는 정치인이다. 1623년 인조의 공주 파천시 왕을 호종 하였고,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항복하는 치욕을 당하였을 때도 남한산성에서 왕을 호종하였다. 

이경여는 영의정에 이르도록 평생을 관직에 있었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포천에서 잠시 서산으로 피란하였으며 인조 7년(1629) 가을에 서산으로부터 모친을 모시고 백강마을로 거처를 정하였다.

백강마을의 대재각(大哉閣)은 이경여를 상징하는 대표적 랜드마크이다. 대재각에는 ‘지통재심 일모도원(至痛在心 日暮途遠)’이라는 여덟 글자가 새겨진 각서석이 있다. “지극한 아픔은 마음에 있고,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머네”라는 뜻이다.

효종이 이경여에 내린 글귀이고,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송시열의 문하들은 백마강에서 자주 모였는데, 송시열이 썼다는 ‘낙화암’이라는 암벽 글씨는 그러한 인연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논산 팔괘정 부근의 금강 풍경
논산 팔괘정 부근의 금강 풍경

이경여는 원래 봉암(鳳巖)이라는 호가 있었음에도 부여와의 인연 이후 ’백강(白江)‘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후손과 친족이 계속 부산의 백강마을에 세거하였다.

이경여는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호종하였으며, 이 때문에 삼전도 치욕을 직접 경험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친명 반청의 인물로 꼽혔기 때문에 김상헌과 함께 청에 끌려가 심양에 붙들려 있었던 아픈 경험을 가지고 있다.

부산서원 입구에 있는 동매(冬梅,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22호)는 이경여의 충절을 상징하는 것이다. 백강 이경여가 명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와 심은 세 그루중 남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매화는 부산과 이경여와 조선의 아픈 역사를 매년 되살린다. 겨울을 이기고 맨처음 꽃을 피우는 매화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새로운 희망을 부풀린다.

이경여가 경험한 아픈 역사는 1천 수백 년 전 백제 패망의 역사와 오버랩되어 사람들에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부산 백강마을의 동매(冬梅)는 그래서 새로운 희망과 부활을 다짐하는 백마강의 상징이기도 하다.  

18세기 유명한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한때 금강변에 거처하였고, '택리지'의 저술도 금강변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이중환의 금강과의 인연은 '택리지'의 팔도총론에서 확인된다. 공주 금강의 정자를 설명하면서, “사송정(四松亭)은 우리 집 정자이고, 금벽정(錦碧亭)은 조상서의 별장”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사송정과 금벽정, 금강을 남북으로 하는 두 정자는 여러 해 전에 복원되어 있다. 그 가운데 사송정의 위치는 신관동 도심에서 멀지 않은 금강변이다.

이중환의 아버지 이진휴(李震休, 1657-1710)가 1701년 충청도관찰사로 공주에 부임한 것이 아마도 그러한 인연의 중요한 계기였을 것이다.         

'택리지'는 이중환의 말년인 1750년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강경의 팔괘정(八卦亭)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해 “내가 황산강(黃山江) 가에 있으면서 여름날 할 일이 없어 팔괘정에 올라 더위를 식히면서” 지은 것이 '택리지'라고 하였다.

이중환은 금강의 상류를 적등강, 공주 부근을 웅진강, 부여는 백마강, 강경 부근은 강경강, 그리고 그 하류는 진강 등으로 모두 구분하여 정리하고 있다. 금강에 대한 사정에 밝았던 면모를 잘 보여준다.

팔괘정 옆에는 죽림서원과 임리정(臨履亭)이 함께 자리하는데, 죽림서원은 원래 황산서원이라는 이름이었고, 임리정은 ‘황산정’이라는 이름이었다. 이 때문에 강경강은 황산강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오래 전 백제 왕들이 즐기던 곳이 천 년 후에는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찾는 명승이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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