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8. 금강을 건넌 사람들

금강의 도시 중에서 특히 공주는 내륙수로와 육로의 대표적 교차점이다. 그만큼 교통상의 기능이 중요하였고, 그것이 백제 멸망 이후에도 공주가 오랫동안 충청의 거점 도시로 살아남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개경 혹은 한성으로부터 호남으로 이어지던 육로 거점이라는 지리적 위치로 공주의 금강은 많은 이들이 넘나들던 강이기도 하였다. 1011년 거란의 침입으로 나주로 피란하던 현종, 1624년 이괄의 난으로 피란한 인조 임금 또한 공주의 금강을 넘나들었던 인물중에 속한다.

현종은 1월 7일 공주를 거쳐 나주로 내려갔고, 인조는 2월 16일 공주에 와서 22일 상경하였다. 이들이 건넜던 금강은 고마나루의 금강으로 생각된다. 고마나루 공주의 한옥마을에는 2011년 공주향토문화연구회에서 세운 현종과 인조의 기념비가 있다.

1377년 나주 유배지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개경으로 상경하는 중 공주를 지나게 되었다. 그때 금강루에서 지은 1편 시가 전한다.

“또 보지 못했는가, 병든 몸 3년 동안 염주(炎州) 남방에 묶여 있다가, 돌아와 또 금강 가에 이른 것을.” 그때 금강물이 흘러가는 것을 내려 볼 때까지도, 정도전에게는 이렇다 할 희망이 없었다. 그러나 6년 뒤인 1383년 그는 함흥으로 찾아가 이성계를 만났고, 그리고 다시 5년 뒤인 1392년에는 조선왕조 개창의 주역이 된다.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을 위해 남도로 내려갈 때, 네델란드의 표류 선원 하멜 일행이 여수에서 한양으로 옮겨질 때도 이들은 공주를 경유하고 금강을 건넜다.

이순신 장군은 정유재란이 일어나던 1597년 1월 함거(檻車)에 실려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풀려나 내려가던 중, 4월 19일 일신역(신관동)에서 1박하고 금강을 건너 논산 쪽으로 내려갔다. 이순신 장군이 일신역에 숙박하고 내려가는 길은 장깃대나루를 건너는 길이었을 것이다. 

1654년 제주도를 출발한 네델란드 하멜 일행 36명은 해남으로 상륙하여 전라도 전주, 여산을 거쳐 충청도 은진, 연산을 지나 6월 공주에 도착하였다.

“다음날 연산으로 가서 하룻밤 묵고, 그 다음날 저녁 공주라는 곳에 도착하였는데 충청도의 관찰사가 사는 곳이라 했다.”

그리고 다음날 ‘큰 강을 지났다’고 한 것을 보면, 하멜 일행은 강을 건너기 전 1박을 한 다음을 금강을 건너 북상한 것이다. 2년 후 서울을 떠나 남으로 내려갈 때 하멜 일행은 동일한 길로 내려갔다고 하였다.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공주의 금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가고, 또 서울로 올라간 것이다. 춘향전에 나오는 남원 내려가는 길, “활원 광정 모란리며, 공주 금강 얼른 건너 늘티 소지 높은행길”이 지금 말하는 그 길이다. 

장깃대나루에서 옮겨진 선정비와 고목(공주시 신관동) 
장깃대나루에서 옮겨진 선정비와 고목(공주시 신관동) 

호남대로상에서 금강을 건너는 대표적 나루는 역시 장깃대나루이다. 금강의 북쪽에는 일신역이 있고, 금강의 남쪽에는 보통원과 효가리원이 있는 곳이다. 일신역의 자리는 지금 공주대학교 캠퍼스 부근의 신도심이다.

1천 여년 육로와 수로의 교차점으로 붐볐던 장깃대나루는 그 흔적조차 찾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일대에는 금강교를 비롯하여 백제큰다리, 공주대교, 신공주대교 등 금강을 가로지르는 매머드 교량이 밀집되어 있다. ‘신관동’의 ‘신(新)’도 ‘일신역’에서 나온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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