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9. 슬픔은 낙화암에서 그치지 않는다, 가림조씨와 연일정씨

부여군 규암면 진변리의 백강마을은 ‘백강’이라는 호를 가진 이경여(李敬輿)로 유명하다. 이경여는 말년에 효종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마지막으로 글을 올린 것은 효종 8년(1657) 여름이었는데, 북벌과 관련하여 군대의 조련과 추쇄를 서두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때에 각서석의 글 ‘지통재심(至痛在心)’ 글귀가 포함된 효종의 비답을 받았다. 효종의 각별한 고심이 절절하게 스며 있는 문구이다. 그리고 바로 8월 8일 이경여는 서울에서 세상을 떴다. 73세의 나이였다. 

손자인 이이명(李頤命)이 숙종 26년(1700)에 ‘지통재심 일모도원’ 8자를 부산 바위에 암각하고 대재각을 건립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대재각’이라는 이름은 '상서(尙書)'의 ‘대재 왕언(大哉王言)’에서 인용한 것이며, 각서석의 글씨 여덟자는 원래 송시열이 써서 이경여의 아들 이민서(李敏敍)에게 준 것이었다.

그것을 손자 이이명이 돌에 새기고 대재각을 세운 것이다.

“그 뜻을 의탁한 것이 감개(感慨)하고 쓴 글씨가 기건(奇健)하여 신은 일찍이 오랫동안 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중략) 신이 이에 온 집안과 계획하여 송시열의 글씨를 모탑(模榻)하여 신의 할아비가 일찍이 거처하던 부여현 백마강 위의 서실 동쪽바위에 새겼습니다.”    

그런데 백강마을에는 부산서원이나 대재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을 입구에 가림조씨와 연일정씨 고부(姑婦)의 열행을 기리는 정려가 세워져 있다.

이경여의 동생 이정여(李正輿) 가계, 이사명(李師命) 처 가림 조씨와 며느리 이희지(李喜之) 처 연일정씨 두 고부의 정려이다. 영조 2년(1726) 6월 1일 백마강 가에 세운 것인데, 1908년에 현 위치로 옮겼다.

이사명(1647-1689)은 이경여의 동생 이정여(李正輿)의 손자이다. 시재가 뛰어났고 형조,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나 1689년 남인이 집권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 때 당쟁으로 인하여 사사 되었다.

아들 이희지(1681-1722) 역시 당쟁의 무고로 인하여 신임사화 때 죽임을 당하였다. 그 충격으로 가림 조씨, 연일 정씨는 차례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이사명의 처가 대재각에 올라 백마강 강물에 투신하니 며느리 연일정씨도 시어머니 장사 후 대재각에 올라 자결시 15구(句)를 기둥에 쓰고 따라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백마강을 배경으로 한 이경여 집안의 가림 조씨와 연일 정씨의 열행은, 천년 전 낙화암의 이야기와 그 이미지가 겹친다. 

‘지통재심’의 각서석이 있는 대재각(멀리 백마강과 부소산이 보인다)  
‘지통재심’의 각서석이 있는 대재각(멀리 백마강과 부소산이 보인다)  

이사명의 아들 이희지(李喜之)가 남긴 대재각에 대한 시가 있다. “목이 메어 여덟 글자 슬피 읊으니/ 아, 뜻 있는 선비의 기개 느껴오누나 / 밭은 갈지만 마음의 피를 뿌렸으니 /비 들어 쓸어본들 그 은혜 갚지 못하리 / 작은 돌에도 천지의 뜻이 서려 있는데 /이생에서 어진 임금 만나지를 못했네 / 밤낮 동으로 흐르는 백마강 / 굽이굽이 언제나 바다에 이를까?”              

‘이생에서 어진 임금’을 만나지 못했다고 한 이희지는 1722년(경종 2) 노론이 무너지는 신임사화로 목숨을 잃었다. 조선시대 부여를 찾는 지식인들에게 부산(浮山)이 명승으로 부각된 것은 대재각과 부산서원의 건립이 한 계기가 되었다.

거기에 가림조씨 연일정씨 고부의 가슴 아픈 열행이 덧붙여 있다. 백마강이 조선의 지식인에 공감될 수 있었던 것은 백제와 함께 전하는 이러한 충절과 절의의 요소, 그리고 비극성이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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