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10. 이존창과 죠조, 순교지로서의 금강

충남지역은 지방민의 자진구도(自進求道)에 의하여, 서울에 이어 두 번째로 천주 교회가 창설된 지역이다.

그 중심에는 여사울(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사람 이존창(李存昌)에 의해 1784년 조직된 여사울 신앙공동체가 있었다. 이에 의하여 충남 서부지역, 내포에는 천주교 신앙이 급속 전파되었다. 

내포지역에서의 천주교 확산은 당연히 공주에도 영향을 미쳤다. 공주의 첫 천주교 신자는 1791년 김명주, 인철・홍철 부자로서, 이존창의 전교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존창은 1791년에 이어, 다시 1795년 말부터 1799년까지 공주감옥에 갇혔는데, 이 때 나막신 장사 고윤득이 이존창으로부터 신앙을 전수받았다.

내포 지역 신도가 무성산 등 공주로 이주해온 경우도 있었고, 공주 출신 신자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 살다 체포되거나 순교한 경우도 있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은 체포되어 서울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 곧 공주로 이송되어 2월 28일 황새바위에서 참수되었다. 충청지역에서의 천주교의 확산을 막기 위한 과시적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공주는 천주교 박해 시절 가장 많은 순교자가 발생한 지역이다. 충청감영 때문에 공주 이외의 주변 지역에서 잡혀온 신도들도 공주에서 죽임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공주에서 특히 순교자가 대거 발생한 것은 1866년 병인박해 이후이다. 

1801년 이존창이 순교한 황새바위
1801년 이존창이 순교한 황새바위

황새바위의 실제 처형장은 오늘날 잘 정비된 산 능선 공간이 아니고 산줄기와 제민천의 물이 만나는 황새바위 구릉의 남측 제민천변 일대였던 것 같다.

황새바위로 알려진 1801년 이존창의 순교지가 '노상추일기'에 ‘금강의 사장(沙場)’이라 한 것도 이점을 암시한다.

50년 뒤인 1912년 황새바위를 찾았던 독일 신부 노르베르트는 황새바위에서의 비극적 사건을 이렇게 적고 있다.

“냇물이 넘치면 피에 젖은 모래가 나무 밑까지 쓸려 왔다. 목 잘린 시신들이 묻히지도 못하고 뒹굴었다. 장마에 냇물이 불으면 시신들은 물살에 떠밀려 모래톱에 파묻히거나 가까운 금강까지 떠내려갔다. 숱한 시신이 가까운 언덕에 매장되어 무덤이 온 언덕을 뒤덮었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 7월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프랑스의 죠조(Moyses Jozeau, 趙得夏, 1866-1894) 신부가 청나라군에 의하여 공주 장깃대나루, 옥룡동의 금강변에서 순교하였다.

죠조신부는 1889년 조선에 들어와 1893년 4월에 전라북도 완주 고산에 있는 배재(梨峴)성당에 부임하였다.

1894년 7월 동학군으로 인하여 성당이 피해를 입고 신변이 위험해지자 뮈텔(Mutel, 1854-1933) 주교에게 연락을 하고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서울을 향하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경하던 죠조신부는 7월 28일 오후 금강을 건너 광정의 주막에서 1박 하고 29일 다시 출발하였다.

바로 그날(1894년 7월 29일, 음략 6월 27일), 천안 성환에서 일본군 혼성여단과 청국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이 전투에서 패배한 섭사성(攝士成)의 청나라 군대가 공주로 후퇴하였다.

죠조신부는 이들 후퇴하는 청군과 마주치게 되어 청국 패잔병에게 붙들려 다시 공주로 내려온다. 그리고 장깃대 나루를 건넜는데 오후 5시 경 옥룡동 금강변에서 동행했던 마부와 함께 살해되었다. 

'한국천주교회의 역사'(최석우)에 죠조 신부의 순교 장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묘사가 있다.

“순간 중국 군인들이 신부를 붙잡아 끌어내려 자기들의 배로 옮긴 후 먼저 강을 건넜다. 강 건너편(옥룡동 쪽)에 이르자 군인들은 즉시 신부를 바싹 에워쌌다. 주위에는 읍내에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 들었다. (중략) 순간 한 군인이 신부 뒤로 다가서더니 신부의 머리를 두 손을 붙잡고 공중으로 들어올리는 시늉을 했다. 군중은 칼이 잘 들게 신부의 목을 뻗치게 하는 줄로 생각했다. 그러나 갑자기 신부의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이후 군인들에 의한 잔인한 칼질이 상세히 묘사되어 있으나 너무 잔인하여 여기에 이를 옮길 수가 없다. 순교의 시간은 7월 29일 오후 5시 경, 바로 그날은 주일이었다. 신부의 시체는 이틀동안 반은 강물에 잠긴 채 버려져 있었다.

교우들이 만 이틀이 지난 31일 밤중에, 간신히 시체를 찾아 그곳에서 가까운 강가에 옮겨묻었고, 그후 조정의 명으로 공주의 충청관찰사는 신부의 시신을 공산성 아래 묻었다. 이듬해 1895년 뮈텔 주교는 죠조 신부의 시신을 서울로 이장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4월 27일, 때마침 피정 때문에 서울에 모인 모든 선교사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죠조신부의 이장이 이루어졌다. 그의 묘는 지금 용산성당 상직자 묘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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