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 2천 년, 인물과 사건

이 글은 충남역사문화연구원 <금강 7-금강이 들려주는 옛 이야기>(2022.12.30. 간행)에 실린 글을 12회에 걸쳐 소개하는 것입니다.

12. 금강의 한 줌 재가 되어, 김영배   

  ‘다음’을 검색하면 ‘김영배’라는 이름의 인물은 무려 62명에 이른다.

그러나 그 가운데 지금 우리가 주목하는 인물, 제3대, 제5대 공주박물관장을 지낸 김영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공주박물관장 김영배는 1971년 7월 무령왕릉 발굴을 통하여 신문 지상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기도 했던, 왕릉 발굴의 첫 번째 수훈자라고 일컬어도 좋을 만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제 백제 땅에서조차 기억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국립공주박물관에서의 특별한 협조가 없었으면, 그의 출생연도를 확인하는 것조차도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김영배(1918-1983)는 공주박물관의 제3대 관장(1962.4.1.-1966.3.15.)과 5대관장(1969.5.21.-1979.6.30.)을 지냈다. 김영배가 공주박물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치안 진공상태가 된 해방 직후의 혼란이 그 계기였다.

박물관이 정비되면서 김영배는 실무를 담당하게 되었고, 특히 6.25 전쟁 때에는 박물관의 소장 유물을 지키는 데 몸을 던졌다.

그러한 사정에 대해서는 나중에 충남역사문화연구원장이 되었던 기자 변평섭이 ‘공주박물관 비사’라는 제목으로 김영배의 증언을 토대로 하여 정리한 자료가 있다. 이를 근거로 해방 이후 초기 공주박물관에서의 그의 역할을 더듬어볼 수 있다.

공주박물관이 문을 연 것은 1940년의 일이었다. 그때 보통학교 6학년이었던 김영배는 입장료 5전을 내고 박물관을 관람하였다. 그때 박물관을 구경하던 한 일본인이 전시 유물을 보고 감탄하는 것을 본 김영배는 각별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 순간 나는 우리 역사에 대한 긍지, 공주에서 태어난 행복감 같은 것을 느꼈고 야릇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때의 내 기분이 내 일생을 크게 변화시켰고, 오늘날 공주박물관과 함께 일생을 보낸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이후 그는 틈만 나면 박물관을 찾았고, 박물관보다 즐거운 곳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박물관은 무주공산이 되었다. 무엇보다 소장 유물이 안전하지 않았다. 이 혼란기에 박물관을 지킨 것은 청년 김영배의 의협심이었다.

그는 오직 애향심과 문화재에 대한 애정 때문에 야간 숙식을 하면서까지 박물관을 자기 집처럼 지켰다. 그러는 사이 한일당약방을 하던 유시종이 미군정의 협조하에 박물관을 맡게 되자 직원으로 그 일을 돕게 된다.

1946년 4월 1일 개관식을 가졌고, 또 행방이 묘연해진 가루베 지온의 유물을 추적하는 등 소장 유물 확보에도 노력하였다. 

1950년 6.25가 나고 7월 16일 공주는 인민군의 치하에 들어갔다. 공주인민위원회가 공주박물관에 설치되었고 몇 차례나 포탄이 박물관 주변에 떨어지기도 하였다.

다음은 김영배의 회고이다. “한번은 또 포탄이 날아와 박물관 진열실에서 남쪽으로 약 1백미터 되는 지점에 떨어졌습니다. 이 바람에 박물관 유리창이 박살나고 기왓장이 우수수 떨어져 이제 박물관도 끝이구나 하고 허겁지겁 방공호에서 뛰어나와 보니 다행히 진열실은 무사했습니다. (중략) 1년을 월급 한푼 못받고 정말 고생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후 인민군이 철수하였지만, 다시 1.4 후퇴 등으로 박물관의 위기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목숨보다 박물관을 택하기로 결의했죠. 만약 우리가 박물관을 버리고 피란을 갔다가 유물이 파손되거나 없어져 버렸을 때 우리는 무슨 얼굴로 국민을 대할 것인가? 무슨 말로 저 세상에 가서 조상을 대할 것인가? 그럴 바에야 유물과 운명을 같이 하자고 결의를 한 것입니다.”

무령왕릉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1971년 7월 8일 발굴되었다. 그 무령왕릉의 발견에 가장 공헌한 인물이 당시 공주박물관장 김영배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장마를 대비하여 6호벽화분을 보호하기 위한 단수구(斷水溝) 시설 작업이 6월 29일부터 시작되었는데, 이 공사는 김영배의 현장 입회하에 실시되었다.

7월 5일 작업중 인부의 삽에서 벽돌이 드러나자 현장 작업은 중지되고, 공주군청을 통하여 문화재관리국에 상황이 긴급 보고되었다. 

7월 7일 김원룡을 단장으로 하는 긴급 발굴조사단이 공주에 도착하였고, 노출된 벽돌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한 발굴을 진행하였다.

다음날 8일 작업이 속개되었는데, 오후 4시 15분, 폐쇄부의 벽돌을 처음 뜯어내자, “무덤 속으로부터 하얀 김이 서려 빠져나오는 것”이 관찰되었다. 내부를 들여다보니 앞쪽에 석수와 지석이 보였다. 그때의 순간을 김원룡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들어낸 벽돌 틈으로 들여다보니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연도 앞쪽에서 바깥쪽을 향해 서있는 일각(一角)의 진묘석수와 그 앞에 놓여 있는 두 장의 석판(지석)이었다. 무덤 바깥은 발굴 관계자, 보도진, 그리고 구경꾼으로 메워 있었다. ‘흥분한 표정 짓지 말고 태연하게.’ 나는 김영배에게 작은 목소리로 주의하였다. 우리가 흥분하면 사람들이 몰려들 것을 걱정하여서였다.”  

연문 폐쇄 벽돌을 뜯고 처음으로 왕릉 내부에 들어선 것은 김원룡과 김영배였다. 왕릉 연도에서 ‘백제 사마왕’이라는 지석의 글자를 보자마자 이것이 무령왕의 왕릉임을 바로 알아차린 것은 김영배였다.

다음은 김원룡의 증언이다. “우리는 우선 한 꾸러미 엽전이 놓여 있는 석판으로 다가갔다. (중략) ‘사마왕-무령왕이다.’ 백제사에 밝은 김영배가 작지만 힘에 찬, 흥분을 억누른 소리를 지른다.”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라는 '삼국사기'에 언급된 기록을 김영배는 그때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김영배는 왕릉 발견 전 멧돼지 같은 짐승이 달려드는 꿈을 꾸었다. 박방룡이 김영배 관장의 부인 백영란을 통하여 듣고 정리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무령왕릉을 발굴 조사하기 전날 밤 꿈에 멧돼지 같은 짐승이 김관장을 물려고 달려들어 도망가다가 관사(館舍) 안방으로 숨자, 멧돼지가 문짝을 들이받아 문짝이 와장창 깨지면서 놀라 꿈을 깨었다. 김관장은 무령왕릉 발굴 조사 때 연도 입구에 놓여 있는 진묘수를 보고 지난 밤 꿈에서 본 멧돼지와 흡사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 이야기는 필자도 김영배 관장으로부터 직접 들은 바가 있는데, 왕릉 발굴에 함께 참여하였던 박용진은 그 꿈이 7월 4일 새벽에 꾼 꿈이었다고 확인하였다. 김태식의 '직설 무령왕릉'에서도 정재훈의 증언을 토대로 이야기를 잘 정리하여 놓았다.  

1971년 7월 8일, 무령왕릉 발굴 현장의 김영배(좌측)(가운데는 안승주, 오른쪽은 김원룡)
1971년 7월 8일, 무령왕릉 발굴 현장의 김영배(좌측)(가운데는 안승주, 오른쪽은 김원룡)

무령왕릉 발굴 이후 1973년에 박물관 건물의 신축이 이루어졌고, 왕릉 유물은 소원대로 새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새 박물관은 세종문화회관과 절두산성당, 국립경주박물관, 부산시립박물관을 설계한 이희태(李喜泰, 1925-1981)의 작품이다. ‘전통건축의 아이콘을 적극적으로 현대화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김영배는 1979년 6월 30일 박물관을 퇴임하였고, 이후 몇 년간은 때마침 시작된  공주사범대학의 공산성 성내 유적 발굴을 지도하였다.

퇴임 직후인 1980년(경신년) 5월 그가 정성들여 쓴, 유언과 같은 다음과 같은 오언 한시 한 점이 우리에게 전한다.  

身終於守濟  몸은 백제를 지키다 마치리니
灰骨於熊津  뼈가루는 고마나루에 뿌려주소
我生於濟土  나는 백제 땅에서 태어나
投影於濟江  백제강의 그림자가 되리라

바램대로 그는 고마나루 금강 물에 한 줌 재로 뿌려져, ‘백제강’의 그림자로 남아 있다. 2004년에는 국립공주박물관이 금강 고마나루가 바라보이는 웅진동으로 이전하였는데, 신축 박물관 건물 뒤편에 ‘우보정(牛步亭)’이라는 이름의 조촐한 정자가 마련되었다.

김영배의 호 ‘우보(牛步)’에서 그 이름을 딴 것으로, 초기 공주박물관 역사에서 지대한 공을 세우고, 무령왕릉 발굴의 단서를 마련한 그의 업적을 기리는 마음을 담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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