昨日山中之木 以不材得終其天年       (작일산중지목 이부재득종기천년)

今主人之雁 以不材死 先生將何處      (금주인지안 이부재사 선생장하처)

材與不材之間 似之而非也 故未免乎累 (재여부재기간 사지이비야 고미면호루)

 

산속에 못생긴 나무가 있었다. 이것으로 베어지지 않고 오래 살 수 있었다.

장주의 집에 못생긴 닭이 있었다. 이것으로 손님의 주안상(酒案床)에 올려지게 되었다.

선생께서는 ‘쓸모 있음’에 처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쓸모없음에 처하시겠습니까?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에 處(처)한다는 것은 허물을 免(면)할 수 없는 것이다. (似之而非也)(사지이비야)

禪家(선가)에서는 매우 강렬한 삶의 자세를 말한다.

碧巖錄(벽암록)에서는 추위와 더위가 닥칠 때 어떻게 이것을 피해야 합니까? 라는 질문에 뜨거울 때는 뜨거움 속으로 들어가고 차가울 때는 차가움 속으로 들어간다. (熱時熱殺遮리 寒時寒殺遮리 (열시열살차리 한시한살차리)

뜨거움을 피한다고 피해지지도 않고 차가움을 피한다고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뜨거움이나 차가움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暫時(잠시)의 망설임 없이 卽刻(즉각) 들어가야한다.

이를테면 죽음이나 삶에 대한 어설픈 姿勢(자세)는 옳지 않다. 보다 깊이 穿鑿(천착)되어 體化(내면화)되어야 한다.

어쩌면 사회적 이목(耳目)이나 체면치레에 자기의 하는 일을 망설이는 일이 있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쓸모있음과 쓸모없음의 중간에서 도태(淘汰)되어 죽임을 당하는 나무나 닭과 다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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