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수장층에 사여품으로 금동관 지급
공주 수촌리, 서산 부장리 출토 금동관 통해 밝혀져
공주박물관 주최, 국제 학술심포지엄서 이 훈 주장

9월 9일부터 10일까지 국립공주박물관에서 개최된 '한성에서 웅진으로' 특별전 기념 국제 학술심포지엄 광경.

충청남도 역사문화원(원장 정덕기)과 국립공주박물관(관장 신창수)은 9월 8일 공동으로 국립공주박물관 강당에서 ‘한성에서 웅진으로’이란 주제로 최민호 충남도부지사, 이준원 공주시장, 조규선 서산시장, 최병현 한국고고학회 회장 등 2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또 이번 학술 심포지움을 기념해 공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공주 수촌리 유적출토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등 2백여점이 전시돼 관람객들에게 큰 호평을 받았다.

 행사를 주최한 충남역사문화원 정덕기원장은 “공주 수촌리 유적과 서산 부장리 유적을 중심으로 관련 유적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규명하기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 고 밝혔다.

4-5세기 백제시대에 지방세력을 중앙에 복속시키기 위해 지역수장 층에게 사여품으로 금동관을 지급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충남역사문화원 문화재센터 이훈 센터장은 9월8일 국립공주박물관에서 거행된 학술심포지엄에서 ‘공주 수촌리 백제 금동관의 고고학적 성격’이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공주 수촌리와 서산 부장리에서 출토된 금동관모를 통해 볼 때 이 무덤의 주인공이 중앙의 문화를 갖고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이 아니라, 각 지역에 기반을 갖고 있었던 재지세력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공주 수촌리 2-1호  금동관모 보존처리후

공주 수촌리 2-1호 금동관모 보존처리후 일부 확대된 모습
이 훈 센터장은 주제 발표를 통해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금동관모를 통해 확인된 특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첫째, 백제지역에서는 금관이 되었든, 아니면 금동관이 되었든 관보다 관모가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에서는 신라와 달리 금관의 출토가 전혀 없다. 금동관 역시 나주 신촌리 9호분이 전부다. 입점리 1호분 역시 대륜과 입식이 출토된 것으로 보아 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그에 비해 용원리유적이나 수촌리유적, 부장리유적에서는 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관모만 확인되었다. 관과 관모가 함께 발견된 곳은 있어도 관만 발견된 곳은 없는 셈이다.  이러한 사실은 백제에서는 관(冠)보다 관모(冠帽)가 더 유행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로 무령왕릉의 경우 관이 아닌 관식이 출토되었다. 왕릉에서도 관이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백제에서는 그다지 관이 유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삼국사기'나 중국의 史書에 보이는 백제의 장신구에 대한 설명을 보면 백제는 왕이 金花로 장식한 오라관을 썼다는 기록은 있어도 금관을 썼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고고학자료 뿐만 아니라 문헌기록을 통해서도 백제에서는 금관이 그다지 유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관모만 발견되고 관모와 짝을 이루는 별개의 관식은 출토되지 않았다. 보통 신라의 경우 관모와 더불어 새 날개 모양의 관식이 함께 발견된다. 다시 말해서 신라에서는 관모를 쓰고, 다시 그 앞에 새 날개 모양의 관식을 꽂아 장식함으로써 관모를 쓰는 의도를 분명히 드러냈다.

그에 비해 백제에서는 이러한 관모 장식이 발견되지 않았다. 대신 수촌리에서 출토된 관모의 경우 전면에 입식은 삼엽의 깃털모양 입식을 정면과 좌우로 길게 뻗어 올려 다른 관모와 차이를 보인다. 입식의 가지마다 집선문양을 중앙 선대의 좌우로 비스듬히 시문하였으며 입식 끝부분에는 꽃문양으로 표현한 것도 차이점이다. 이렇게 백제에서는 신라와 달리 별개의 관모 장식이 발견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물론 후면에 입식이 있는 것도 백제 관모만의 특징이다. 수촌리에서 발견된 관모는 후면에 방패모양으로 제작된 입식이 남아 있다.

공주 수촌리 금동관모 2-1호 용문양

셋째 기본 구조가 동일하다. 다시 말해서 고깔모양의 기본형에다 뒷면에 대롱처럼 생긴 빈 관을 통해 연결된 수발장식이 붙어 있는 것이 백제 금동관모의 기본 특징이다. 물론 관모를 押捺로 장식한 것과 透彫로 장식한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인 모티브는 같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백제의 관모가 지역적으로 넓은 지역에서 발견되고 있고, 또 출토된 유적의 성격도 각각 다르지만 그것을 만들어서 착용한 목적이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넷째, 같은 금동관모에서도 약간의 차이가 보인다는 사실이다. 앞서 설명한 대로 수촌리에서는 1호분과 4호분에서 금동관모가 출토되었는데, 모두가 전?후입식과 수발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다만 수촌리 1호분에서 출토된 것이 정교한 투조와 문양처리 방법에서의 높은 세공기술을 발휘한 것이라면 수촌리 4호분에서 출토된 것은 1호분의 것을 모방하여 만든 듯하며, 기본 양식은 같으면서도 미숙한 투조 기술이 엿보인다는 사실이다. 

서산 부장리의 것도 수촌리 1호분에서 출토된 것과 마찬가지로 정밀한 투조 기법 등 제작기술이 뛰어난 것이 특징이다. 전식과 후식이 있는 것은 수촌리 것과 동일하지만 수발이 없는 것이 부장리 출토 금동관모의 가장 큰 특징이다. 

이훈 센터장은 “수촌리의 금동관모는 1호 토광묘에서 출토되고, 4회 횡혈식석실분에서도 출토되었는가 하면 서산 부장리에서는 5호 분구묘에서 출토되기도 하였다. 이렇게 금동관모가 출토된 고분 묘제가 다양하다는 것은 이 무덤의 주인공이 중앙의 문화를 갖고 지방에 파견된 지방관이 아니라 각 지역에 기반을 갖고 있었던 재지세력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면서 “지역 수장층에게 금동관을 사여 한 것은, 이는 이 시대에 백제가 중앙통치를 했다는 증거이며 이 부분은 앞으로 백제의 지방통치체제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주장했다.

전시된 금동관을 관람하는 이준원 공주시장, 정덕기 충남역사문화원장, 최민호 충남도부지사, 이훈 센터장.(좌로부터)
이날 심포지움에서는 임영진(전남대)교수는 ‘고흥 안동고분 출토 금동관의 의의’를, 이한상(동양대)교수는 ‘신라, 가야의 관모와 백제 금동관의 비교’를, 일본인 毛利光 俊彦씨(유네스코 아시아문화센터)는 ‘일본 출토 금동관의 계보’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이어 중국인 邵磊연구원(남경시박물관)은 ‘무령왕비 목침에 그려진 어용문(魚龍紋)의 기원’을, 정광용교수(전통문화학교)는 ‘부장리 5호 금동관 보존처리 및 시료분석’을, 이현상씨(공예가)는 ‘수촌리 4호 백제 금동관의 제작기법’에 대해 주제를 가지고 각각 발표했다.

이날 심포지움의 개최 목적은 최근 각종 개발과정에서 4~5세기 백제유적과 중요유물이 다수 확인됨으로써 백제사 연구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고 무령왕릉 발굴 이후 지속적인 고고자료의 증가에 따른 백제문화의 재조명 계기를 마련하게 되는데 있다.

행사를 주최한 충남역사문화원 정덕기원장은 “공주 수촌리 유적과 서산 부장리 유적을 중심으로 관련 유적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백제문화의 우수성을 규명하기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다” 고 밝혔다.

한편 이번 학술 심포지움을 기념해 공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는 공주 수촌리 유적출토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 및 서산 부장리 유물 등 2백여점이 전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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