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차프차르봉의 석양

스물스물 그리워진 고생했던 인도

여행전문가들이 마지막 여행지라고 말하는 인도와 네팔을 6년 전 다녀온 일이 있다. 그때만 해도 인도는 너무 열악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배낭여행객들에게는 그야말로 고행이었다. 처음엔 더러워서 못 먹고, 그 다음엔 인도의 특이한 향신료 때문에 못 먹고, 나중에는 화장실 때문에 못 먹어서 한달 동안에 몸무게가 무려 13키로나 빠졌었다. 그 정도로 고생을 많이 해서 “다시는 인도에는 가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어려웠던 일은 망각의 세계로 잊혀지고 묘하게도 스믈스믈 인도가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그 뒤 4년 만에 다시 인도와 네팔을 다녀올 기회를 가졌었는데 서양의 선진국이나 흔히들 쉽게 다녀오는 아시아권의 관광지와는 전혀 다른  여행경험을 한 나는 주위사람들에게 무용담으로 어찌나 자랑을 많이 했는지 내가 일하고 있는 공주청소년자원봉사센터의 운영위원 선생님들의 열화와 같은 꼬득임에 다시 한번 네팔의 히말라야 등정계획을 하게 되었다. 패키지여행으로 가면 모든 것을 여행사에서 해결해 주지만 우리는 자유여행을 하기로 하여 결국 경험이 있는 내가 총대를 메고 안내를 맡았다.
나를 빼고는 네팔여행이 모두 처음이니 할 수 없이 가이드가 되었다. 한 팀을 인솔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였지만 일상을 벗어나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가슴 설레는 일이 아닌가? 

 

히말라야의 포터
“노 플러블럼”이라며 만만디

배낭여행의 수칙 『제1조, 짐은 최대한 적게 싸라』는 조항에 맞춰 내 짐은 최소로 줄였지만 네팔에 있는 티벳 난민촌에 갖다 줄  영평사에서 후원받은 생필품과 몇 사람의 마음을 담아 챙긴 옷가지들, 그리고 태국의 친구에게 줄 선물을 챙기다보니 어느 새 짐꾸러미가 3개나 추가되었다. 어쨌든 8명의 우리 대원들은 보무도 당당하게 히말라야를 향해서 들뜬 마음으로 오후 5시 40분 비행기에 몸을 싣고 드디어 인천공항을 출발했다.
여행경비를 줄이기 위해 태국을 경유해서 카투만두로 가는 경로를 택했기 때문에 태국에서 내려 비행기를 바꿔 타야 했는데 우리가 도착한 시각은 현지 시각 9시 30분경이었지만 카투만두행은 그 다음날 오후1시 50분 출발이어서 하는 수 없이 하루를 태국에서 묵어야만 했다.
그동안 자유여행을 몇 차례 다녔지만 혼자 다니다가 막상 팀의 리더가 되니 그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떠나기 전에 철저히 준비한다고 작년에 다녀온 경험을 살려 이것저것 인터넷도 뒤지고 팜플렛도 찿아 보면서 정보를 기록해 두었고 패키지여행을 통해 몇 번이나 와 보았는데도 처음 온 것처럼 긴장이 되었다.
호텔에 도착, 오랜 만에 만난 친구와 함께 시원한 맥주 한잔 하면서 수다를 떨다보니 드디어 한국을 떠나 긴 여행이 시작됨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이틑 날 호텔에서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후  택시를 타고 일찌감치 공항에 도착하여 느긋하게 짐도 부치고 카투만두행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쇼핑을 하였다. 그런데 늘 “노 플러블럼”을 외치면서 자기들 마음대로 하는 인도의  후진국형 코리안타임이 이곳에도 원정을 왔는지 방콕에서 오후1시50분 출발 예정이던 비행기가 5시10분이 되어서야 겨우 출발했다.

1500루피 택시비, 500루피에 깎고 쾌재

딱히 호텔을 예약해 놓지 않았던 우리들

포카라 홍금보 식당의 여행자 게시판
은 한국사람이 운영하는「네팔짱」이라는 게스트 하우스로 가기위해 택시를 잡았다. 정해진 가격이 없는 이들 특유의 외국인 상대 바가지요금을 깎기 위해 흥정을 하면서 정말로 네팔에 온 실감을 했다. 그러나 내가 누구인가? 인도여행에서  물건값 깎기를 졸업한 나는 실력을 한껏 발휘하여 1500루피를 달라는 밴 요금을 500루피에 깎고 쾌재를 부르며 네팔짱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했다. ‘산적’이라는 닉네임에 걸맞게 생긴 이집 여사장이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며 며칠 째 카투만두 전체가 교통파업으로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데 용케도 잘 왔다며 우리가 타고 온 밴 요금에 또 한번 놀라고 있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왜 하필 지금이야? 라고 투덜거려 봤자 교통파업 문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선 해결할 문제는 카투만두에 산재해 있는 7군데의 세계문화유산을 둘러보고 가려던 우리의 계획을 어떻게 수정할 것인가 였다. 만일 내일도 차가 다니지 않는다면 걸어 다닐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두어 군데의 세계문화유산만 보고 가야 할 형편이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지금 협상테이블에 앉아있는 네팔정부와 파업자들 간의 협상이 잘 되어 내일부터는 차가 다닐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를 하며 잠자리에 드는 일 뿐.....
겨울엔 건기라 여간해서 오지 않는 네팔에  늦은 밤부터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침대위에 추운 한기가 스며들어  선잠을 자고 있는데 “오늘부터 차가 다닌 답니다. 빨리 일어나서 출발 준비하세요” 하고 소리치는 이집 쥔장의 반가운 말에 잠이 확 달아났다.
야호! 그럼 그렇지! 천하의 대원이가  가는데 누가 감히 길을 막아?
의기양양해서 고양이 세수를 하고 부리나케 짐을 꾸린 뒤 이곳에서 대절해준 밴을 우리팀과 다른 몇 사람의 한국인들이 함께 타고 히말라야를 가기위해 포카라로 향했다. 로컬버스보다 몇 배의 비싼 요금을 주고 가지만 그동안 차가 다니지 않아 며칠씩 발이 묶여있던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행운아였다. 어쩐지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박타풀 광장 벼룩시장에서
인도로 망명한 달라이라마 법왕

네팔은 거의 산악지대로 되어 있어 수도인 카투만두에서 산행을 하기위해 가야 하는 포카라까지의 도로가 꾸불꾸불한 산길이어서 거리는 겨우 200키로 밖에 되지 않지만 시간은 5시간 이상이 걸렸다. 미리 산행허가를 받지 못한 우리는 포카라에 도착하여 1인당 거금 2000루피씩을 주고 허가서를 받은 후 산행준비를 위해 산악용품 집에 들러 부족한 장비들을 빌려서 곧장 산행기점인 나야풀로 향했다.

태국의 황금사원
티벳은 1949년 중국인민해방군이 침입해서 전국토를 점령함으로써 정신적 지주였던 달라이라마 법왕이 인도로 망명하게 되고. 1959년3월 라싸봉기가 진압되기에 이른다. 달라이라마를 따라 약 8만명의 티벳인이 망명하여 인도, 네팔, 부탄에 정주하고 있다. 난민의 유입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현재 난민의 수는 약 13만명 이상 이라고 한다. 1959년 4월 29일 인도 북부지방으로 망명한 달라이라마 법왕은  티벳 임시정부를 수립하여 지금까지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무저항, 비폭력주의로 티벳의 독립운동을 계속하고 있다.
티벳인들은 주로 인도와 네팔에 망명하여 자기들끼리 난민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데 그들은 국적이 없어 취직을 할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티벳남자들은 거의 집에서 놀면서 놀음이나 술로 허송세월하고 여자들이 방물장수 등을 하여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라 생활이 무척 어렵다. 그런데도 얼마 안되는 물건을 가져간 우리에게 극진히 손님대접을 하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렸다.
하루빨리 티벳이 독립이 되기를 빌며 티벳난민촌을 뒤로 하고 산행 기점인 나야풀에 도착하니 거의 5시가 다 되어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내일부터 시작될 8일간의 대장정에 설레는 마음인지 잠이 쉽게 오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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