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향토문화연구회원  박수현

이도국박물관에서 니시다니 명예관장의 설명을 듣고 있다.
지난 5월 31일부터 6월 4일까지 공주시민 32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의 일원으로 무령왕의 출생지로 알려진 일본 가라츠市 가카라시마(加唐島)와 북큐슈 지방의 백제역사 탐방을 다녀왔다. 무령왕국제네트워크협의회(회장 정영일)와 공주향토문화연구회(회장 윤여헌)가 주최한 이번 방문은 6월 3일 제6회 무령왕탄생제에 참가하고 주변의 백제 발자취를 돌아봄은 물론, 오는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에 가라츠市를 초청하는 민간교류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이번 방문의 의미를 더하게 되었다.

5월 31일 아침 드디어 출발이다. 어제 밤 꿈속에서 백제인을 만나느라 잠을 설쳐서인지 아니면 여행을 떠나는 흥분 때문인지 가슴이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다. 나만이 아니라 방문단 모두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 흥분을 배웅 나온 이준원 공주시장의 편안한 인사가 비로소 환한 웃음으로 바꾸어 놓는다.

나고야 城을 둘러보는 일행.
옛 백제인 이라면 금강 하구 서해안의 어디쯤에서 뱃길로 출발했을 그 길을 우리는 천 오백년을 넘어 고속도로로 부산으로 향했다.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윤용혁 교수의 사회로 서로를 소개하면서 방문단의 서먹함을 덜어본다.

맨 뒷자리쯤 자리를 잡은 내 차례가 오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이 복잡하다. ‘무슨 말을 하지? 회초리도 먼저 맞으면 낫다고 앞자리에 앉을 걸 그랬나?’ 이런 상념 끝에 어느 덧 내 차례다. 마침 차창 너머로 무심히 스쳐가는 들 꽃 무리가 “꽃은 사람이 말을 걸어주지 않아도 갖가지 향기로 말을 걸어온다. 사람에게도 품성의 향기가 있다”는 이해인 수녀의 글을 떠 올리게 한다. 어쨌든 그 비스름하게 갖다 붙이면서 이번 여행을 통해 나에게서 역사의 향기가 조금이라도 풍길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어정쩡한 인사로 소개시간을 무사히 넘겼다.

이제는 백제인이 갔을 바닷길로 일본을 향할 부산항이다. 백제인이 건넜고 그들이 왔으며, 백제의 선진문화가 조류를 타고 흘러갔고 그들의 부러움이 넘나들었을 가까운 나라 일본이 왜 오늘날에는 가끔 멀게 느껴질까 하는 생각이 지나간다. 바람과 조류에 돛을 맡기고 부지런히 앞을 살피며 지나가는 백제인의 배를 추월하며 우리는 쾌속정을 타고 나는 듯 파도를 가른다.

뱃머리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멋진 여행을 상상하게 하다가도 백제인이 ‘선의(善意)’로 건넜을 이 길을, 조선통신사가 ‘평화’로 건넜을 이 길을 그들은 왜 이 바다를 까맣게 뒤덮고도 남을 ‘침략선’으로 건넜을까 하는 생각이 여행의 출발을 무겁게 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라’는 생각으로 머리를 흔들며, 태초에 신(神)이 육지를 빚다가 손에 남은 흙을 털어 뿌려놓은 듯 한 섬들을 감상하노라니 어느 덧 배는 후쿠오카의 하카다(博多)항에 닻을 내린다. 일본에서의 첫 밤은 오호리 공원 호수위로 떨어지는 낙조(落照)와 하카다항의 별빛 속에 그렇게 조용히 잠들었다.

구마모토 城 앞에서 기념촬영.
6월 1일. 일본에서의 첫 아침이자 우리 여행의 둘째 날이다. 오늘은 일본에 4개밖에 없는 국립박물관 중 하나인 국립큐슈박물관과 일본 야요이(청동기)시대 유적지인 요시노가리 역사공원, 한·일간 미묘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중 하나인 후나야마 고분, 그리고 일본 3대 성(城)중 하나인 구마모토성을 둘러보는 일정이다.

요시노가리 유적지를 살펴보는 회원.
큐슈박물관으로 가는 길에 후쿠오카시의 위성도시인 인구 6만의 다자이후시에 들러 1300년 전 세웠다는 다자이후정청(大宰府政廳) 유적지를 보기로 했다. 서기 663년 백제부흥군과 일본지원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이 금강 하구인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패한 후 백제는 완전히 멸망하게 되는데, 그 이후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일본의 서쪽 변경인 이곳에 백제 망명 귀족의 지도로 최대 지방관아인 정청(政廳)과 산성(山城) 등의 방위시설을 설치하였다는 것이다. 지금은 남아있는 주춧돌의 크기로 그 당시 정청의 규모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지만, 정청을 중심으로 대야성(大野城)과 수성(水城)을 쌓고 포기할 수 없는 백제부흥의 꿈을 안고 이국에서 망국의 한을 달랬을 백제인의 탄식이 귓가에 들려오는 듯하다.

백제인의 한을 마음속으로 위로하며 국립큐슈박물관으로 향하는 길. 일본에는 국립박물관이 작년에 개관한 큐슈박물관까지 4개밖에 없다는 윤용혁 교수의 설명에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일본이라고 우리보다 전시할 유물이 적을 것도 없을 텐데 국립중앙박물관을 포함하여 12개의 국립박물관을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가 유독 역사와 문화를 더 사랑하는 민족이라서 그럴까? 아니면 국립박물관 건립마저도 선거공약으로 무분별하게 남발하기 때문은 아닌지 하는 잡념을 기왕에 건립된 박물관이라면 그 내용과 운영을 알차게 하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작년 큐슈박물관을 방문했을 때, 공주 학봉리의 철화분청사기가 큰 규모로 전시되어 있는 것을 보고 마음이 착잡했다는 윤용혁 교수의 설명에 일행의 마음도 그러했으리라. 그런데 일년 후 오늘은 스미모또 그룹에서 대여하여 전시했다는 조선백자들이 국적을 잃고 이국의 박물관 유리진열장에 죄인처럼 갖혀있는 듯 한스런 눈길을 보내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우리 발길은 어느 새 기원전 3세기부터 기원후 3세기까지 600년이나 지속된 일본 야요이시대의 중요한 유적인 요시노가리의 목책 앞에 이르렀다. 이 요시노가리 유적에서는 일본 야요이시대의 모든 시기에 걸친 유구와 유물이 발견되어 이 시대에 어떤 식으로 사회가 변화되어 갔는가를 알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은 곳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공주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서정석 교수는 이곳을 부여의 송국리 유적과 비교하여 설명하였다. 서 교수는 요시노가리 유적과 송국리 유적은 그 성격과 중요성으로 볼 때 거의 흡사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요시노가리 유적지는 연간 100만 명이 찾는 명소가 되어있고, 부여의 송국리는 쌀농사의 기원을 기원전 6세기까지로 끌어올린 중요 유적지임에도 불구하고 버려진 채 점점 유실되어 가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였다. 역사와 문화가 정신만이 아니라, 포장하여 상품화 할 대상이기도 한 것을 생각하면 송국리의 현실은 차라리 분노까지도 느낄 일이다.

요즘 한·일간의 역사학계는 임나일본부설의 설명 자료로 인용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을 둘러싸고 적잖은 속앓이를 하고 있는 모양이다. 우리는 구마모토성으로 가는 길에 우리 公州市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구마모토縣 菊水町에 위치하고 있는 전방후원분인 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에 들렀다. 이곳은 잘 다듬어진 판석(板石)을 밀착되게 설치하여 전체적인 모습이 마치 백제의 횡혈석실분을 보여주는 듯하며, 출토유물 대부분이 백제와 많은 관련이 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이 금동제관모인데 이것은 공주 수촌리 ·익산 입점리·나주 신촌리·서산 부장리에서 출토된 그것과 거의 흡사하며, 거울·금동제신발·귀걸이 등은 공주 무령왕릉의 유물들과 형태 및 제작기법이 매우 유사한 것으로 확인된 것들이다. 때문에 일본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내세우려해도 출토유물의 성격상 직접적 근거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서정석 교수는 판석 무덤은 사비시대의의 특징이며 금동제신발의 구갑문양 등을 고려할 때 이 무덤은 6세기까지도 그 시기를 내려 볼 가능성까지 조심스럽게 제시하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일본 3대 명성의 하나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 의해 임진왜란 직후인 1607년에 축성된 구마모토성(熊本城)을 둘러보았다. 적병들이 쉽게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우리나라 여자들의 치마폭처럼 늘어져 벌어진 독특한 모양의 성벽이 인상적이다. 또 곳에 따라서는 수직으로 쌓아올린 조선성의 특징도 보인다니 임진왜란을 통하여 포로로 잡혀간 조선 백성들의 축성기술과 공력이 동원되었음을 쉬게 짐작해 볼 수 있다. 견고하고 화려하며 정교함 뒤에 숨어있는 정치적 목적을 읽어내야 한다는 서정석 교수의 설명이 구마모토성을 바라보는 우리의 눈을 열어주는듯 하다. 호텔 유리너머로 내리는 빗방울 속에 구마모토에서의 두 번째 밤이 잠들어 간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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