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츠시 대표자와 한담을 나누는 정영일 회장과 윤용혁 교수.
일본에서의 셋째 날이 밝아온다. 밤새 추적거리며 내리던 비는 어느 새 말끔하게 개어 오늘 일정을 우리보다 먼저 준비하고 있다. 오늘은 구마모토를 출발, 선편으로 유명해(有明海)를 건너 제2차 세계대전시 원폭투하로 유명한 나가사키(長崎) 일대를 돌아보는 일정이다.

가당도 초등생들이 '어서오세요'라고 한글로 쓴 현수막을 들고 일행을 맞이하고 있다.
구마모토를 출발하니 맑던 하늘은 또 비구름에 가리고, 안개비가 마치 구름처럼 우리가 탄 배에 몰려왔다 물러가기를 반복한다. 흩어지는 안개비 사이로 보일 듯 말 듯 수줍은 얼굴만 내미는 먼 섬들이 처음 만나는 인사를 건네는 듯하다. 한 시간 여를 달린 끝에 배는 우리를 나가사키의 시마바라市에 내려놓는다. 인구 4만의 작은 도시 시마바라는 일본의 가장 서쪽 변방에 위치해 있으나, 일본 역사에서는 가장 변두리는 아니라고 한다. 지리적 변방은 결국 바다를 통해 건너오는 새로운 문명의 도래지라는 문화적 보상을 가져다주었으며, 서양 문물의 유입처로 카톨릭의 전통과 유적을 많이 간직하게 된 곳이 바로 시마바라이다.

'우리는 백제인이야'라고 쓴 깃발을 꽂고 있는 가당도 주민.
우리는 일본에서 일행에 합류하게 된 한남대학교 사학과 이정신 교수의 설명으로 시마바라城을 돌아본다. 이 교수는 일본 역사 교과서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 시마바라의 반란에 대해, 좀처럼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던 일본 역사에서 참 독특하고 주목받을 만한 사건으로 파악하면서 이 반란의 원인을 城을 축조할 당시의 가혹한 부역에 대한 불만과 기독교 탄압에 대한 항거의 성격이 결합된 것으로 진단하였다. 이 교수는 설명의 말미에 우리나라 고려시대 무신정권기의 농민과 천민의 난과 연결하여 들불처럼 타올랐던 12세기 민란의 출발이 바로 공주 명학소(지금은 대전 탄방동 부근)의 난에서 시발되었음을 상기시킨다.

이제 우리를 태운 버스는 삼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곧게 뻗은 여든 여덟 굽이 원시(原始)의 숲길로 일본 28개 국립공원 중 제1호로 지정되었다는 운젠(雲仙)을 향해 오른다. 해발 1,080m의 니따또께 전망대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보겐다께 봉우리에 오르는 길은 운젠(雲仙)이라는 말 그대로 ‘구름 속 神仙’이 따로 없다. 안개비를 머금은 비구름이 바람에 몰려다니며 살짝살짝 보여주는 후겐다께와 1990년에 폭발했다는 헤이세이신잔(平成新山)의 흉물스런 모습에 일행은 연신 탄성과 함께 셔터를 눌러댄다. 내려오는 길, 우리는 허옇게 속살을 드러낸 불모지와 기괴한 소리로 김을 내뿜으며 솟구치는 열탕이 지옥을 연상시킨다는 지옥온천에 잠깐 발을 담그고, 운젠산 자락 끝 조용히 자리 잡은 오바마 해변 온천마을을 지난다. 마을 여기저기 그리 높지 않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온천 수증기가 마치 우리 시골마을의 저녁밥 짓는 연기 같아 정겹다.

무령왕탄생제 장면.
이제 우리는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으로의 시간여행에 오른다. 2차 대전의 끝, 미국은 전쟁의 신속한 종결을 위해 이 곳 나가사키에 ‘패트맨’(Fat Man;뚱보)이라는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당시 24만의 나가사키 인구 중 약 7만4천명이 사망하고 7만 5천명이 부상당하는 참극을 만들었다. 피폭지 평화의 공원에 세워진 여인상의 표정은 단순해 보이지만 온갖 시름을 끌어안고 있는 절제된 고통으로 다가온다. 폭심지에서 약 800m 떨어진 산노(山王)신사 부근의 민가에 있었던 벽시계는 버섯구름이 일었던 11시 2분에서 영원히 멈추어 서 있었고, 이 ‘영원한 11시 2분’은 우리 인류가 영원히 기억해야 할 마음의 시계여야 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미국은 당초 북구주 공업지대인 소창市에 원폭을 투하할 예정이었으나 기상악화로 이곳에 원폭을 떨어뜨렸다니 작게 보면 역사가 과정과 필연의 결과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연의 결과이기도 하다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령왕 탄생제 중 한 장면.
여행의 넷째 날, 오늘은 드디어 이번 일정의 하이라이트인 무령왕탄생 축제에 참가하는 날 이다. 천 오백여년 전 이 뱃길을 지났을 백제인들과 전설 같은 대화를 나누다보니 나고야 항을 출발한 배는 어느 덧 무령왕이 탄생했다고 전해지는 가카라시마(加唐島)를 저만치 앞두고 있다. 이번 여행 중 가장 큰 흥분이 머릿속을 흔든다. 작고 예쁜 민박마을 같은 섬의 선창에는 올망졸망한 아이부터 어른까지 섬의 전체 주민인 듯 환영인사가 넘쳐난다. 고사리 손에 태극기를 들고 ‘가카라시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라고 한글로 쓴 현수막으로 우리를 환영하는 아이들이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다 만나는 가족의 반가움과 그리움을 느끼게 한다.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전해지는 오비야 동굴 앞에서 단체촬영.
일본서기에 의하면, 백제 23대 개로왕이 동생인 곤지(琨支)를 일본에 보내게 되었는데 곤지가 마침 만삭이던 왕비를 달라고 요구하게 되고 개로왕은 왕비가 도중에 출산하면 母子를 함께 돌려보낸다는 조건으로 그 요구를 수락했다는 것이다. 일본으로 가는 도중 개로왕의 부인은 축자(筑紫)의 각라도(各羅島)에서 아이를 낳고 곤지는 모자(母子)를 백제로 돌려보낸다. 이 아이를 무령왕이라 하고 이 섬을 주도(主島)라 하며 무령왕의 이름이 ‘사마’(斯麻)인 것도 섬의 일본말인 ‘시마’에서 유래했다는 것이다.
공주대학교 역사교육과 윤용혁 교수는 “국내 학계가 일본서기의 기록에 주목하게 된 것은 1971년 무령왕릉이 발굴되면서”라고 학계의 동향을 설명한다. 발굴된 지석(誌石)에는 무령왕의 나이와 생몰연대가 기록되어 있었고 이는 삼국사기보다 오히려 일본서기의 것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실제 이곳에는 무령왕이 여기서 태어났다는 전설과 태어난 동굴, 그리고 태어나서 바로 씻겼다는 우물이 존재하고 있다.
어쨌든 가카라시마 주민들은 1999년부터 무령왕이 태어난 6월마다 무령왕탄생축제를 지내왔으며, 공주시도 무령왕릉 발굴 30주년이 되는 2001년부터 이곳과 교류를 시작하여 2006년에는 무령왕 탄생 기념비를 건립하기에 이르렀다. 윤용혁 교수는 무령왕 기념비의 건립과 교류가 한·중·일을 잇는 문화벨트의 시초가 될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조만간 진행될 우리나라 역사교과서 개편에 포함되는 東아시아史에서도 3국의 공통된 역사 소재인 백제와 무령왕을 통하여 서로의 역사인식을 가깝게 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소망하였다.

작년에 건립한 기념비 앞에서 한·일 양국의 주민이 형제처럼 함께 한 무령왕 탄생제는 참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심장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듯 한 제관의 축문은 마치 무령왕이 당신의 한 자손들을 향한 간절한 바람을 전하고 있는 듯 애절하다. 무령왕께서 바람결에 들려주는 바람대로 당신을 인연으로 하여 모인 우리들이, 한·일 양국이, 그리고 한·중·일 삼국이 평화로운 바닷길을 열어가기를 진심으로 기원해 본다.

이번 방문을 통하여 우리는 작은 성과를 확인하였다. 우리가 이번에 방문한 답례 차원에서 오는 10월 백제문화제에 가라츠市에서 방문단을 파견하기로 하였고, 지난번에 우리 공주시에 보냈던 학생들의 홈스테이(home-stay)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이번에는 우리 학생들의 일본 홈스테이 방문을 준비하기로 하였으며, 무령왕 탄생 기념비 옆에 기념비 건립에 참여한 후원인들의 이름을 새긴 기념돌을 세우기로 하는 등 민간교류 사절로서의 역할을 나름대로는 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백제와의 대화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공존번영의 길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번 방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해 준 이준원 공주시장과 공주시청·공주시의회에 감사를 표하며, 자세한 설명으로 우리를 천오백년 전 백제로 이끌어 준 윤용혁 교수와 서정석 교수, 한남대 이정신 교수에게도 깊은 고마움을 느낀다. 아울러 자신의 모든 열정을 바쳐 무령왕네트워크협의회를 이끌어 온 정영일 회장과 백제와의 큰 사랑을 헌신적으로 만들어 준 금강뉴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공주에 도착하는 길, 송산리 고분군 무령왕릉 위에 별 빛으로 반짝이는 무령왕께서 우리를 대견하다고 따뜻하게 맞아주는 것 같다.(끝)


글 : 공주향토문화연구회원 박 수 현                                        

사진 : 금강뉴스 명예기자   채 수 명   

 

 

 

저작권자 © 금강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