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두산 정상에 올라 천지를 병풍삼아 한컷 찍었다.

 

마지막 황제 푸의의 위황궁.

공주대 최고경영자 11기 원우 42명이 백두산 연수를 간다. 다른 해외연수는 많이 다녀왔지만 백두산 연수는 마음가짐이 다르다.

일행들은 인천공항에서 1시간50여분을 비행기로 달려 길림성 소재지로 인구737만명에 종합적으로 발전한 장춘에 도착해 버스 두대로 나누어 타고 장춘시내로 나갔다.

첫 느낌은 교통이 엉망이라는 것. 경적은 왜 그리도 울려대는지. 무질서가 질서에 가까웠다. 하지만 다행히 교통사고는 적다고 한다. 도착한 곳은 마지막 황제 푸의가 생활했던 곳인 위황궁이다.

중국에서 자금성 다음으로 크다는 위황궁은 소금창고를 개조해 지었으며 푸의 마지막황제가 5명의 왕후들과 지냈던 곳으로 일본의 통치아래 너무도 우울하고 침울하게 살아온 흔적이 곳곳에 묻어있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일행도 잠깐의 여유를 맛보고 연길로 향했다.

식사는 첫날부터 고추장에 비벼먹는 한국식이었다. 더러 현지식에 적응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한국에서 가져간 고추장에 썩썩 비벼 먹으며 떠나온지 채 하루도 안된 한국을 생각했던 것은 아닐지.

 

주민이 한삽씩 판 인공호수, 명월호.

다음날인 6월7일 민족의 혼이 담겨있는 백두산 등반을 하기 위해 버스로 이동 중 양쪽으로 펼쳐진 넓은 옥수수밭과 아직 농지정리가 되지 않은 논을 보고 우리나라의 7,80년대 그림을 보는것 같았다.

가는 도중 바다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넓은 호수가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설명이 ‘명월호’라는 저수지라고 하는데 모택동의 지시로 국민들이 직접 한삽한삽 파서 만든 인공저수지로 백두산 천지의 3배 면적이란다.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명월호’를 만들기 위해 희생된 모든 사람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드디어 백두산 입구에 도착을 했다.

▷ 나무사이로 멀리 보이는 장백폭포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가 싶더니 햇빛이 반짝하고 또 구름 잔뜩끼어 컴컴하다 싶더니 어느새 우박이 쏟아지고 참으로 변덕스런 날씨다. 드디어 백두산 천지를 만나러 출발.

겨울점퍼에 장갑을 끼고, 우비도 준비를 하고 완전무장을 한채 등반길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온천입구까지 가서 나무계단을 오르는데, 1,000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천지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가로수는 자작나무로 식재되어 있었고 이름 모를 꽃과 풀이 조심스레 피어있는 것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백두산 진입로 가로수들은 나뭇잎이 없다. 이제 겨우 새싹이 돋아나지만 채 3개월도 안돼 겨울의 찬서리에 얼어 죽는다고 한다. 그 모진 날씨에도 굴하지 않고 핀 꽃이 또 풀이 어찌 사랑스럽지 않으랴.

점점 힘이 들기 시작한다. 겨우 앞만 보고 올라가는데 어디선가 우렁찬 물소리가 들려왔다. 놀라 쳐다보니 장백폭포다. 길이 80m의 장엄한 폭포줄기가 천지를 뒤흔든다는 우람한 장백폭포는 그야말로 거대하고 장엄했다. 짜릿한 감동을 느끼며 다시 한번 천지 주변의 봉우리를 바라봤다. 보고 또 보고 생각을 해도 감동적인 장면의 연속이다. 역시 대자연은 삶의 의미를 깨우치게 한다.

장백폭포주변에 위치한 최고 82도에서 최저 37도의 다양한 온천군을 스쳐 보며 백두산 온천수로 만든 삶은 달걀을 별미로 1개 맛보고 폭포를 배경으로 사진을 몇장 찍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가파르게 자리하고 있는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백두산 천지는 평화 그 자체

숨이 턱까지 찬다. 너무 힘이 든다. 그런데 이때 내려오는 사람들이 힘 빠지는 소리를 한다. 올라가야 안개가 끼어서 아무것도 안보여 소용없으니 올라가지 말라는 것이다. 휴~ 하지만 기운을 차리고 한발 한발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열 번오면 두 세 번 볼까 말까라는데, 그래도 우리는 천지를 볼 수 있을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올라갔다.

이럴줄 알았다. 얼어있는 천지의 얼굴이 보였다. 신비로움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가슴이 터질 것 같더니 어느새 일행들의 모습은 백두산 천지의 장엄함에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입만 크게 벌리고 있었다.

민족기상의 발원지인 백두산 천지는 비록 얼어있었지만, 천지의 모습은 평화 그 자체였다. 일행들은 수도 없이 사진을 찍고, 숨을 고르며 천지의 매력에 흠뻑 빠졌다. 넋을 잃고 있는데 빗방울이 떨어진다. 그러다 빗방울이 눈이 되어 내린다.

흠뻑 비에 젖어 몸은 천근만근이었지만 백두산 천지를 보았다는 사실에 마음은 가뿐했다. 오늘 하루 피곤함을 달랠 수 있는 민속풍정원이라는 온돌방에 여장을 풀고, 저녁은 송아지 요리로 맛있게 먹고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

▷ 은은한 아코디언 소리로 민속풍정원 아침을 열었다.

 

민족시인 윤동주와 서시(序詩)

▷  민족시인 윤동주님의 손때가 묻은 노트들.

6월8일 꿈에 그리던 백두산을 뒤로한 채 버스를 타고 용정으로 이동했다. 용정은 조선족이 제일 먼지 발을 붙인 곳으로 인구 60만명중 71%가 조선족이란다.
말라서 물이 없는 해란강을 지나쳐 비암산 정상에 위치한 소나무로 독립운동의 혼이 담겨져 있는 일송정을 일정이 여의치 못해 멀리서 바라보았다. 우리가 알고 있던 일송정은 1938년에 시들어 죽고 1993년도에 백두산에서 가져와 심어 지금까지 자라고 있는 나무가 지금의 일송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민족시인 윤동주님의 삶이 깃든 학교 ‘대성중학교’에 도착했다. 그의 체취가 저 노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하여 가슴을 뭉쿨하게 한다. 사춘기 소녀 때 문학소녀를 한번쯤 꿈꾸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그때는 ‘윤동주’의 정신세계보다는 ‘서시’ 속의 아름다운 싯귀절에 더 마음이 끌렸던 시절이라 친구에게 편지를 쓸 때나 연애편지 쓸 때도 이 싯귀절을 살짝살짝 인용하곤 했었다.   

죽는 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중략)

윤동주를 비롯한 독립운동가였던 안중근 등의 사진이 걸린 이곳이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발길을 묶어놓는 것은 한민족의 핏줄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제 그들의 흔적을 뒤로 하고 도문으로 이동, 두만강으로 향했다.

▷ 대성학교 전시실에 전시된 독립운동가들의 모습과 업적들.

 

두만강 푸른물은 흙탕물로 변해...

▷ 흙물이 흐르는 두만강.

멀리 두만강이 보인다. 북한의 남양시가 보이는 중국과 북한의 두만강 접경지대로 북한의 용암기차역에 군인초소가 있고 앞에는 두만강이 흐르고, 나는 바로 옆 길을 버스로 달리고 있다.

▷ 두만강 건너 북한 땅을 바라보는 사람의 뒷모습이 쓸쓸해 보인다.

어느 노래가사 처럼 ‘두만강 푸른 물에~’가 아니고 ‘두만강 흙탕물에~’였다. 생각했던것 보다 폭이 좁고 강 건너에는 북한 군인 2명이 경계근무를 서고 있었다. 분단의 아픔이 절실히 실감났다. 4명이 한조를 이루어 대나무 배를 타고 북한 군인이 서 있는 곳 가까이까지 노를 저어 가는데 왠지 겁이 났다.

곁눈질로 살짝 군인들을 보았다. 새까맣게 그을려 눈동자만 하얀 두명의 북한 군인은 우리를 보고도 아무런 표정 없이 멍하게 서 있었다. 측은해 보인다. 뭐라도 주고 싶은 마음인데 아무것도 주면 안된다는 안내를 들어서 꾸~욱 참았다.

내 가족을 두고 온 것 같은 심정으로 뱃머리를 돌렸다. 마음이 찡했다. 숙소로 돌아왔지만 마음의 여운은 가시지가 않아 가슴 밑바닥 자그마한 주머니에 자리하고 있었다.

불과 3박 4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먼 길을 다녀온 기분이다. 정말 많은 것을 보았고, 들었고, 배웠다. 그리고 조선족의 애환까지 엿볼 수 있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노래로 부르며 민족의 혼을 느낄 수 있었고, 동포애를 통해 하나의 세상에 살고 있다는 동질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다음에는 우리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길 기대해 보면서 그리고, 공주대 최고경영자과정 11기 원우들이 건강하고 밝은 웃음으로 각자의 생활로 돌아가게 된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이번 여행을 정리한다.

▷ 즐거운 점심시간.....

▷ 여기가 무엇하는 곳인가 하면, 화장실. 들어가 보면 ㅎㅎㅎ

▷ 문화광장에서 팽이치는 여인
▷ 대성중학교 전경
▷ 장엄한 장백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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