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은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전북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의 물줄기는 북서방향으로 흐르다가 신탄진에서 갑천과 합류하고 다시 부강에서 미호천과 합류하여 물줄기의 방향을 서남방으로 틀어 공주·부여를 서해로 유입하는 긴 강이다.

▷ 연미산 정상에서 본 금강

예로부터 금강은 비단처럼 아릅답다하여 ‘錦江-비당강’이라 불렸다. 충청인의 젖줄이자 생명수인 금강은 충청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 그 자체다. 신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다시 세종시로 건설 추진 중인 공주·연기지역을 아우르는 금강을 재조명하고자 이번호부터 공주·연기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강변의 누정>을 기획하며 첫 번째로 공북루를 시작으로 연재한다./ 편집자주

▷ 공북루

 

공북루(拱北褸)

소동파는 적벽강에 놀았으나   
나는 지금 창벽(蒼壁)에서 놀고... 
         
10보(步)를 나가면 금강이다

공북루(拱北褸)
□소 재 지:  공주시 금성동 165
□건립연대: 1603년(선조 36)
□지정사항: 유형문화재 제 37호

▷ 공북루 현판

 

○ 위치 및 자연환경

공북루는 공주시 금성동과 산성동에 걸쳐 있는 공산성(公山城)의 북문루(北門樓)로 금강(錦江)에 인접하여 있다. 공산성은 공산(公山)에 있는 성곽(城郭)으로 백제시대에 처음 토성(土城) 축조되었다. 이후 통일신라. 고려조를 거쳐 조선 중기에 석성(石城)을 새로 쌓아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공산성은 웅진성(熊津城), 쌍수산성(雙樹山城), 공산상성(公山山城), 공주산성(公州山城) 등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졌다. 웅진성은 백제,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되었다. 쌍수산성은 1624년(인조2), 인조(仁祖)가 쌍수(雙樹)의 이름을 특별히 하사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특히 여지도서 대동지지 등의 지지류에서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있다. 쌍수 산성의 이름을 제외한다면 조선시대에는 거의 공산산성, 공주산성, 공산성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공산성은 남쪽으로 공주시내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금강의 남안에 접하여 있다. 특히 금강에 접한 북쪽으로는 공주의 관문인 금강철교가 가설되어 있고, 금강물과 백사장, 공산성의 산세(山勢)가 한데 어우러져 제법 좋은 경치를 이루고 있다. 예전부터 공북루는 공산성의 여러 문루 가운데에서도 경치가 좋기로 이름난 곳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환은 『택리지(澤里志)』에서 성 북쪽에 있는 공북루(拱北樓)는 제법 웅장하고 물가에 임하여 경치가 좋은 곳이다. 선조(宣祖) 때 서경(西?) 유근(柳根)이 누(樓)에 올라 시 한 구절을 지었다.

▷ 공북루에서 본 금강다리


    소동파(蘇東坡)는 적벽강(赤壁江)에 놀았으나    蘇仙赤壁
    나는 지금 창벽(蒼壁)에서 놀고,                今蒼壁
    유양(庾亮)은 남루(南樓)에 올랐지만            庾亮南樓
    나는 여기 북루(北樓)에 올랐노라              是北樓

대개 창벽은 금강 상류에 있으며, 누(樓)의 이름이 공북루인 때문이었다라고 하며 공북루의 경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즉 공북루는 공산성 내에서 규모가 큰 건물이었고, 금강가에 바로 임하여 출렁이는 강물과 강 너머 널찍하게 펼쳐진 평야, 그리고 평야 너머 병풍처럼 일렬로 봉우리를 잇대어 걸쳐 있는 산들을 보는 풍광이 절경을 이루었던 모양이다. 여기에 나루터 혹은 다리를 이용하여 강을 건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목민관들에게는 생생한 백성들의 삶의 현장을 지켜볼 수 있는 곳이었기도 할 것이다.

이렇듯 공북루는 공산성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이에 충청도에 부임하는 관찰사를 비롯한 여러 관리들과 공주를 오고가는 여러 선비들은 공북루에 올라 또는 공북루 앞을 배를 띄워 놓고 유람을 하면서 많은 시를 지었으며, 또한 아직도 다수의 작품이 남아 전하고 있다.

 

○ 기능 및 유적으로서의 가치

공북루는 공산성의 4방에 설치된 문루 중 북쪽 문에 해당하는 것으로, 성문을 나서면 나루를 통하여 금강을 건너게 되어 있다. 이 공북루는 선조 36년인 1603년에 옛 망북루의 터에 신축한 것으로, 처음 신축 후 여러 차례에 걸쳐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문루 건축의 대표적인 것으로 꼽히고 있다.

공주는 호남과 서울을 연결하는 가장 가까운 육로로 교통의 거점이다. 또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내륙수로인 금강의 중류에 위치하여 수로와 육로의 간선 교통체계가 서루 맞추지는 위치이기도 하다.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문루의 역할을 하였으며, 금강의 남과 북을 연결해주는 나루와 금강기교(錦江杞橋)로 나가는 문이기도 하였다. 즉 공북루는 교통의 중심지로 “10보를 나가면 바로 금강이다” 라는 기록에서 보듯이 공북루는 금강과 바로 인접하여 있었고, 근처에 금강나루와 교량이 있었다.

금강 나루터는 현재 공북루의 앞에서부터 금강철교 바로 옆으로 금강 배다리가 있었던 곳까지 약 200M 정도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기교는 겨울에 설치하여 봄에 철거하는 임시 다리였다.
이렇듯 공주는 중부지방의 가장 중요한 수로교통과 내륙교통의 거점이었고, 공북루는 교통 거점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한 문루였다.


현재 공북루를 찾아가 보면 금강철교의 개통과 시대의 변화에 다른 교통수단의 변화로 예전에 공주 교통의 중심지였다는 면을 알아채기는 어렵다.

또한 공산성의 북문으로서 출입문은 온데간데없고 단지 문이 끼워져 있었던 구멍만을 찾아 볼 수 있다. 이 문을 통해 앞으로 몇 발짝 나아가면 풀숲과 마주치게 되고 이어서 곧바로 금강물에 접한다.

예전의 배다리도 없고 나루도 향하던 길도 더 이상 찾을 수가 없다. 이렇듯 공북루는 문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예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전히 변함없는 기능하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이것이 바로 누각의 기능이다. 조선시대 공주지역에는 금강변의 경치가 아름다운 곳에 8개의 정자를 세웠고 이를 ‘금강 8정’ 이라 불렀다고 한다.

공북루가 이 ‘금강 8정’에 끼지 못한 것은 물론 정자가 아닌 성(城)의 문루였었기 때문이지만 이들 정자가 위치한 경관에 못지않은 아름다운 경치를 간직하고 있었다.

이는 공북루를 소재로 하여 금강의 아름다움을 말한 시가 상당수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도 증명된다. 또한 오늘날에도 공산성에 관광차가 찾아오시거나 산책을 나오시는 분들이 이 누각에 올라서서 강북의 경치를 바라보며 감탄사를 자아내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 일몰의 전망대

○ 유적현황

유근이 건립하였다는 공북루는 공산성의 북문으로 금강을 바로 통할 수 있는 문루이다. 공북루는 옛 망북루 자리에 선조 36년 신축한 것으로 처음 건축한 후 수차례에 걸쳐 수리가 이루어졌다. 그래도 본래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으며, 강변에 위치하고 있어 강남과 강북을 왕래하는 남북통로의 관문으로, 조선시대 대표적 문루로 꼽고 있다.

공북루는 앞면 5칸. 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높은 기둥을 사용한 2층의 누각 건축으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래층은 통행로로 쓰고있다. 공산성 내의 건축물 가운데 규모가 큰 편으로 면적은 남문인 진남루의 2배 가량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고창읍성의 공북루와 유사한 모습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는 같은 간격이며, 누의 아래층 중앙에는 출입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현재 공북루에는 문루(門褸)의 명칭인 ‘공북루(拱北樓)’라고 쓴 현판이 성의 안쪽에 해당하는 추녀 밑에 걸려있다. 또한 건물의 기둥과 기둥사이의 종보와 도리에는 중수기문 5개, 시문 8개가 걸려있어 모두 14개의 현판이 있다. 공북루 안에서 바라보는 강북의 확 트인 풍경과 함께 내부에 걸려있는 여러 개의 현판은 경치를 더욱 멋스럽게 해주고 있다.


글 서흥석(충남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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