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미산에서 본 공주전경과 금강

 

□소 재 지: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 내
□건립연대: 17세기(추정)

<위치 및 인문 자연 환경>

쌍수정이 있는 공산성은 옛 시인 묵객들이 금강 첫머리의 빼어난 절경에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붓을 들었던 곳이다.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1588~1644)의 쌍수정기(雙樹亭記)에서,

 ‘공주는 호전(湖甸)의 도회(都會)로 차령이 동북을 동괄하고 금강이 띠를 두르고 있다. 쌍수정은 형승이 뛰어나다(公山卽湖甸 一都會也  車嶺綰轂基東北 而錦水爲帶 雙樹之亭 尤據形勝)’라고하며 이곳의 형세를 잘 요약하여 설명해 주고 있다.

▷ 벚꽃이 만발한 쌍수정의 봄

쌍수정이 있는 공산성은 경관도 경관이지만, 지리적 특성으로 굵직굵직한 역사의 흔적이 배어 있는 곳이다. 곧 백제의 웅진 도읍 때에 궁성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기도 하며, 백제 멸망기에는 의자왕과 부여 융이 머물렀던 회한의 땅이었고, 통일신라 때에는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켰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공산성은 임진왜란에 명나라의 군대가 주둔하면서 호서지역의 왜군과 대치했던 지휘부이기도 했던 곳이며, 임진왜란 직전에는 충청감영이 이곳으로 옮겨질 정도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곳이었다.

▷ 쌍수정 앞에 진달래가 활짝 피었다.

이러한 사건들을 통해 보면 이괄의 난으로 정세가 위험해지자 인조는 부득이 남천(南遷)을 결의하고 공주로 향한 것도 결코 우연을 아닐 것이다. 조정에서 대신들이 피난지를 논의하면서, 정경세(鄭經世)는 영남의 충의로운 선비가 난세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으며, 김류(金)는 무예를 숭상하는 호남의 풍속이 쉽게 난세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하지만 대사간 장유(張維)의 의견에 따라 결국 공주 공산성으로 정해졌다.

이때 장유는 “공주산성은 전방에 긴 강이 펼쳐 있어 형세가 대단히 좋을 뿐 아니라 길 또한 멀지 않으니 우선 공주산성에 들어가 정세를 관망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를 들고 있었다. 결국 쌍수정은 공산성으로 피난 온 인조로 인해 건립된 것이다.

 

<연혁>

쌍수정은 인조대왕과 깊은 인연을 간직한 정자이다. 1624년 2월 8일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임진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접한 인조는 조정 논의를 거쳐 공주로의 피난을 결정하고 그날 밤, 궁궐을 급히 나와 양재역-과천을 거쳐 9일 수원에 도착하고, 다음날인 10일 수원을 출발하여 직산을 거쳐 12일에는 천안에 도착한다. 천안에서 내려오던 어가는 공정창(현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에서 때마침 왕을 위해 올라오던 전라도 관찰사 이명(李溟)의 2천 병력으로부터 호위를 받으며 공산성에 이르렀다.

▷ 공산성의 일몰

공산성에서 피난하고 있던 인조는 두 나무에 기대여 멀리 북쪽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이 괄의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에 인조는 두 그루의 나무에 금대와 통정대부의 작호를 내렸다고 한다. 쌍수정은 이러한 사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자이다. 이러한 사정은 1788년 관찰사 홍억(洪檍)이 지은 쌍수정중수기(雙樹亭重修記)에 잘 보인다. 중수기에 의하면,

쌍수정은 쌍수의 옛터에 정자를 세워 이름진 것이다. 옛날에 인조가 남쪽으로 내려왔을 때 하루는 이 나무 사이에 어거하여 서울을 바라보았다.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여기에서 괴수의 머리를 받는 예를 받고 나무에 금대(金帶)를 하사하고 총애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나무의 수명이 다하고 옛 사적이 흩어지자 식자들이 그것을 한스럽게 생각하여 갑인년(1734)에 관찰사 이공에 인해 3칸의 정자를 건립하였다.

라고 하여 두 그루의 나무가 죽어 옛 흔적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엣터를 기념하기 위하여 관차라 이수항(李壽抗)이 영조 10년(1734)에 쌍수정을 건립하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낙전당(樂全堂)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은 ‘쌍수정기(雙樹亭記)’를 지어 ‘인조가 검을 차고 말에 올라 공산성 쌍수정(車駕以丁卯入公州 湖南勤王之師畢集 咸奮憤鼓勇 軍容盛張 翌日上帶劍乘馬 幸山城 御雙樹亭)에 행차’ 하였다고 하였고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두타초(頭陀草)에서도 ‘쌍수정’이라 언급하여 쌍수정이 영조대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쌍수정은 인조가 금대를 두르면서 바로 지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이수항의 건립 기록은 중수에 대한 착각일 수도 있다. 추가 자료를 통해 정확한 건립연대를 판단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787년(정조11)에 관찰사 홍억(洪億)이 대지를 평탄하게 한 후 다시 건축하였으며, 고종 1903년(광무 7)에는 관찰사 홍승헌(洪承憲)이 다시 수축한 것으로 전한다. 이후 1947년에 공주읍 보승회의 주관으로 중수한 바 있으며, 1970년에는 옛 건물을 전면 해체하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새로 복원하였으며 2006년 현재 복원 공사 중에 있다.

 

▷ 쌍수정의 야경

<관련 일화>

인조가 무사히 공주로 몸을 피하고, 이괄의 난이 3일 천하로 막을 내리기까지의 과정에서 공주 출신의 인물들이 많은 활약을 하였다. 대표적인 인물을 보면, 당대 서인계의 인물들로서 창주 김익희, 후조당 이후원, 인조반정 공신이자 호위대장으로 인조를 측근에서 모신 이귀(李貴) 등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중앙의 관리로서 서울에서 공주까지 직접 왕을 따른 사람들이다.

그런가 하면 지역인으로 순척박씨 박정제는 음서로 참군을 지내다가 인조의 어가를 호종하여 공주에 이르렀을 때 배가 없자 벗은 몸으로 얼음을 깨고 건널 수 있게 하여 원종공신에 올랐다. 예안김씨 김경록도 이괄의 난 때 호가를 했고 단양 우상중 역시 서울에서 왕을 호종할 때 한강에 이러러 배가 없자 직접 헤엄쳐 강 건너편의 배를 가져왔다는 사실이『인조실록』에 전한다.

또 인조의 공주 파천을 기회로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부상하는 인물들도 적지 않다. 예를 들면『여지도서』에만 기록된 조왕동(助王洞)과 노숙으로 유명한 공주의 만경노씨 라든가, 무안박씨 박종원 등은 이를 기회로 향촌사회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사람들이었다. 또한 공주에 남천한 인조를 보필하여 여흥 민여심과 화순 최기수는 그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 공주 목지도 중 공산성 부분

왕은 어려운 피난 기간에 자신을 도와준 지역사람들에게 특혜를 주었다. 즉 인조는 파천하면서 지나온 여러 지역의 주민에 대해서 향후 3년간 대동미 1두(斗)씩을 감해주었고, 특별히 공주에는 2두씩을 감해 주었던 것이다.

또한 응시자격을 전라도와 충청도에 한하여 2월 16일 공산성에서 과거 시험이 개최되었다. 그런데 다섯 명 중에 공주사람이 한 명도 들지 못하였다하여 여섯 번째 점수를 얻은 강윤형(姜允亨)에게도 특별히 급제를 내렸다.

또 공주시 정안면에 석송리(石松里)라는 마을이 있는데, 그 곳 역시 인조가 피난올 때 거쳐간 마을이다. 원래 마을이 깊숙이 들어가 있어서 내동, 안말 또는 연못이 있어서 연댕이라고 불렀지만 인조가 이곳에서 쉬어가면서 바위와 소나무가 있다고 하여 석송(石松)이라 불렀다. 이후부터 마을 이름을 석송리라 하였고, 이 곳의 나무 벌목도 막았다고 한다. 현재 석송동에서는 석송정이라는 정자와 바위에 ‘石松洞天’이라는 새김 글이 전해진다.

한편, 공주 이인면 오룡리(五龍里) 마을에는 숭선군의 묘가 있으며, 이 묘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이인면 만수리에는 인조를 호종하여 인종의 묘정에 배향되고 영의정에 추증된 이귀(李貴)의 묘와 신도비도 있다.


<쌍수정을 읊은 詩들>

쌍수정은 많은 시객들이 찾아와 시를 읊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두타(頭陀)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입재(立齎) 강재항(姜再恒, 1689~1756), 귀록(歸鹿)조현명(趙顯命, 1691~1752),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 관찰사 조명정(趙明鼎), 홍수주(洪受疇)등이 있다. 이중에서 관찰사 조명정과 홍수주의 시를 소개한다,

          12난간 금강 머리에
          형승은 오직 남쪽 이 고을이로다
          바람은 배에 따뜻하고 봄음 바다에 달리고
          하늘의 북두칠성이 낮게 보이니 밤이 정자에 드리웠도다
          오색 구름은 오히려 단봉(丹鳳)을 불 수 있는데
          4마리 말은 무슨 이유로 흰 갈매기를 부러워 하는고?
          말을 들으니 이곳 높은 대인 쌍수정에서 임금님이 머물렀다 하니
          술잔을 머물러 고금의 근심에 슬퍼하고 슬퍼하도다
                                                 -관찰사 명정(趙明鼎)-

            계룡산 가을 구름은 말 머리에 걸려 있고
            우연히 임금님이 명령을 받고 웅주에 이르렀도다
            남쪽으로 순행안 왕기는 이제 쌍수정에 있고
            북을 바라보는 신하의 마음은 이 한 누대로다
            멀리 아득하고 아득한 긴 길이 뻗어있는 것을 베었고
            평평하게 큰 강물이 곤곤히 흐르는데 임했도다
            술이 취함에 글을 지어 전의 빚을 갚으니
            빼어난 남아가 이 좋은 땅에서 놀도다
                                               -관찰사 홍수주(洪受疇)-

▷ 쌍수정의 봄


<유적현황>

쌍수정 동쪽으로 50m의 거리에는 1708년(숙종 34)에 건립된 쌍수산성사적비가 있다. 사적비에는 380여년 전 이괄의 반란과 인조의 남천에 대한 내력, 공산성에 머물렀던 5박 6일동안의 행적, 그리고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모습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를 세우게 되기까지에는 80여년의 시간이 걸리게 된다.

처음에 비문은 1624년(인조2) 관찰사 이명준(李明俊)과 목사 송흥주(宋興周)가 우의정 신흠(申欽)에게 비문을 받아 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루지 못하고, 그 후 44년이 지난 1668년(현종9)에 관찰사 민유중(閔維重)이 우암 송시열(宋時烈)에게 추기(追記)를 받게 되었고 돌을 운반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또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 그 후 40년이 지난 숙종 34년에 세우게 된 것이다.
글/ 이춘진(충남역사문화원)
사진/ 신용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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