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은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전북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의 물줄기는 북서방향으로 흐르다가 신탄진에서 갑천과 합류하고 다시 부강에서 미호천과 합류하여 물줄기의 방향을 서남방으로 틀어 공주·부여를 서해로 유입하는 긴 강이다.

▷ 공산성 누각으로 떨어지는 일몰

예로부터 금강은 비단처럼 아릅답다하여 ‘錦江-비당강’이라 불렸다. 충청인의 젖줄이자 생명수인 금강은 충청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 그 자체다.

신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다시 세종시로 건설 추진 중인 공주·연기지역을 아우르는 금강을 재조명하고자 이번호부터 공주·연기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강변의 누정>을 기획하며 첫 번째로 공북루를 시작으로 연재한다/편집자주


 

소재지 : 연기군 남면 나성리 1101
건립연대: 1430년
지정사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46호

 

<위치 및 자연환경>

독락정이 위치한 연기군 남면 나성리(羅城里)는 금강 변에 고립된 형태로 해발 26~45m정도의 구릉지를 이루고 있다. 나성리는 조치원(혹은 공주)에서 대전으로 연결되는 경부간 1번 국도의 바로 연변으로, 연기군 금남면 소재지인 대평리와는 바로 금강을 사이에 두고 있는 지점이고 공주군(장기면 당암리) 와 접경 지역이다.

 

독락정 앞을 흐르는 금강은 특별히 “삼기강(三岐姜)” 이라 칭하는데, 그 까닭은 경상· 전라· 충청의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나성리 부근은 과거 ‘山岐’ 혹은 ‘世巨里’ 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데, 있는데 나성리, 양화리, 진의리, 월산리, 송담리를 포함하는 넓은 지역적 범위를 일컫는 개념이 있었다. 나성리에서 금강 남쪽의 금남면 대평리 사이에는 나루터가 있어 이를 나리진(羅里津) 또는 나성진(羅城津)이라 불렀다.

독락정이 있는 나상리에는 토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그래서 지명도 나성이다. 이 토성은 현재 독락정이 위치한 강변으로부터 나리재 구릉의 정상부에 이르는 선을 따라 구축되어 있는바, 백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지역은 당시 신라와 접경한 서쪽 변경에서 백제의 도성으로 연결되는 요충에 해당할 뿐 아니라 금강의 수로를 관망할 수 있는 곳인 셈이다.

이처럼 독락정이 위치한 삼기강 일대는 큰 강줄기가 만나는 곳으로 에부터 뛰어난 자연경관을 자랑하고 있는 곳이다. 남수문이 지응 독락정기에서 500년 전 독락정에서 바라본 사방의 경관을 상상할 수 있다.

▷ 금강변의 독락정 전경, 오른쪽에 전월산이 보인다.

 

<연 혁>

독락정은 주변 경관이 뛰어나 ‘금강8경’ 중의 하나로 일컬어지고 있다. 독락정의 건립과 관련하여 가장 오래되고 자세한 자료는 남수문(南秀文, 1408~1443)이 지은 독락정기이다. 하지만 정자를 누가, 언제, 건립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남수문이 지은 독락정기에 의하면 독락정은 임 난수의 둘째 아들인 임목(林穆, 1371~1448)이 낙향하여 건립한 것으로 가록하고 있다. 건립 시기는 대략 1407년(태종 7년)에서 1422년(세종 4)사이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독락정기를 지은 남수문의 이력과 연령을 고려해 보면 1439년(세종 21)에 건립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일리가 있다.

남수문(南秀文, 1408~1443)이 「독락정기」를 짓게 된 사연은 그의 부친과건립자인 임목의 친분 때문으로 남수문의 부친이 함주목사로 있을 당시 임목이 함주의 판관으로 있으면서 서로 교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이에 남수문은 임목을 아버지처럼 섬겼다고 전해진다.

임목이 정자의 이름을 독락(獨樂)이라 한 것은 송나라 정치가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이 은퇴하여 만든 정원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다. 그는 당시 보수파의 영수로서 진보적인 왕안석(王安石)의 개혁정책에 반대 했었는데, 벼슬을 그만둔 후 지금의 하남성 낙양현의 성남(城南)에 정원을 만들어 그 이름을 독락원(獨樂園)이라 하였으며, 스스로 그 경과와 심회를 담은 독락원기(獨樂園記)라는 글을 지었던 것이다.

독락정기의 내용을 살펴보면 임목이 남수문에게 한 이야기의 첫 부분에서 그의 집안이 여러 대를 거쳐 금강 상류에 살아왔다는 사실과 그곳의 당 이름이 삼기라고 불리게 된 내력, 독락정을 건립하기 전 지세 등에 대하여 우리 집안은 대대로 공주 금강 상류에서 살아왔는데, 경상· 전라·충청의 강물이 이곳에서 합류하기 때문에 그 땅을 이름 하여 삼기(三岐)라 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남쪽으로 5리쯤 되는 곳에 끊어진 산이 있는데,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2리쯤 가서 재가 작은 봉우리를 이룬바 긴 대와 무성한 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서 가히 사랑스럽고, 세 강물이 굽실거리며 동쪽으로부터 그 아래를 둥글게 감싸며 흐른다. (위 고딕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임목은 삼기강 주변의 절경을 버려두기가 아깝고 이를 즐기려는 뜻에서 그 봉우리 왼편에 터를 닦고 정자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연유로 건립된 독락정은 건립 후 18세기에 들어 조선 후기후손인 덕량(德樑)이 유적이 오래되어 종인(宗人)들과 더불어 재물을 몰아 새롭게 중수 되었다. 이때 중수기문을 권상하(權尙夏)의 문인인 채지홍(蔡之洪, 1683~1741)이 지었다. (獨樂亭重修記 『鳳巖集』)이 사이와 뒤에도 여러 차례 중수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전해지는 자료가 많지 않고 중수 현판도 남아 있지 않아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 264호로 지정되었다.

 

<관련성씨>

독락정을 세운 부안 임씨는 임란수의 연기지역 정착으로 터전을 마련한 이후 양화리를 중심으로 연기 일대에 많이 세거하고 있다.

임란수는 전라도 보안현(保安縣:현 전북부안)에서 아버지 임숙(林淑)과 어머니 유씨(劉氏)사이에서 태어나 32세의 나이로 공민왕 23년 최영장군과 함께 탐라를 정벌하여 큰 공을 세웠는데, 당시 오른쪽 팔을 적에게 잘리자 잘린 팔을 화살 통에 꽂고 싸워 전승으로 이끌었다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흥복도감(興福都監) 록사(錄事), 낭장(郎將),· 호군(護軍)등 11관(官)을 거치고 마지막으로 공조전서에 올랐으나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목 삼기촌( 현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 낙향하여 생활하다가 1407년 (태종 7) 6월 21일에 생애를 마감했다.

▷ 대동여지도 중 삼기강과 나라진 부근


전서공이 죽은 뒤 1418년에 길재· 정몽주· 임 난수 등 18인을 제사 지내다가 세종기해(1419)에 고려의 유신으로 조선조에 벼슬하지 않은 임 난수의 사당에 임씨가묘(‘林氏家廟)’라 선액,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도록 명하였고, 아울러 사패지(賜牌地)로 ‘나성일구강산(羅星一丘江山)’을 하사하였다. 아마 이 때에 하사받은 사패지지가 고려시대 절터가 있던 나성리 일대와 현재의 양화리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어쨌든 이 지역이 조선조 이후에는 부안 임씨의 500년 가전지지(家傳支地)가 되었고, 독락정도 이러한 사정 가운데서 조영된 것이었다.


1682년에는 자손이 전서공 묘를 보수하고 우암 송시열이 찬한 신도비를 세우게 된다. 즉 전서공이 죽자 자손들은 묘소를 연기 동쪽 불파미 임좌(壬坐)의 언덕에 마련하였는데, 1679년(숙종 5)8대손 호군 찬현(纘賢)이 묘소를 보수하던 중에 376자의 지석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를 근거로 우암에게 신도비문의 찬술을 부탁하게 되었다. 그리고 1710년에는 임란수를 제향하는 사원건립으로 이어졌다. 여러 고을 선비들이 두 임금을 섬기지 않은 큰 절개를 높이 사모하여 사우를 세워 사액을 청원하는 상소가 있었고 이를 계기로 기호서사를 창건하게 된다.

 

▷ 전월산에서 바라본 금강과 독락정 주변 풍경

금강 물은 서쪽으로 흐르고 해도 기우니
방초 물가의 두 약이 나그네 혼을 어지럽게 하네.
눈에 보이는 우주가 어슴프레한데
풍경을 붓으로 쓰자 품평거리에 드네.
만고강산은 소동파의 적벽이고
한 구비 천석은 유종원의 우계인데,
벼랑 따라 천천히 나귀 타고 지나노라니
흰 깁처럼 둘린 오솔길이 보이는구나.
                

  -심언광(沈彦光)-

 

글 이춘진(충남역사문화연구원)
사진 신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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