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은 한강과 낙동강에 이어 남한에서 세 번째로 큰 강이다. 전북 장수군 신무산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의 물줄기는 북서방향으로 흐르다가 신탄진에서 갑천과 합류하고 다시 부강에서 미호천과 합류하여 물줄기의 방향을 서남방으로 틀어 공주·부여를 서해로 유입하는 긴 강이다.

▷ 연미산에서 본 공주전경과 금강

예로부터 금강은 비단처럼 아릅답다하여 ‘錦江-비당강’이라 불렸다. 충청인의 젖줄이자 생명수인 금강은 충청인들의 마음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 그 자체다. 신행정수도에서 행정중심복합도시로, 다시 세종시로 건설 추진 중인 공주·연기지역을 아우르는 금강을 재조명하고자 이번호부터 공주·연기지역을 중심으로 한 <금강변의 누정>을 기획하며 첫 번째로 공북루를 시작으로 연재한다./ 편집자주

 

▷ 만하루

만하루(挽河樓)

□소 재 지: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내
□건립연대: 1754년
□지정사항: 비지정문화재

<위치>
 만하루(挽河樓)는 공주시 금성동 공산성의 동편에 있는 깊이 약 9m 연지(蓮地)와 금강 사이에 세워져 있다.
공산성은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북쪽으로 우리나라 대표적 내륙 수로중에 하나인 금강(錦江)이 유유히 흐르는 해발 110m의 능선에 위치하는 천연의 요새이다. 군사적 요충지이면서 동시에 교통상의 중요성으로 인해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왕도(王都)를 지켰으며,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이후 충청도 감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연혁>
 만하루의 연혁과 관련하여 『여지도서(與地圖書)』성지(城地)조를 살펴보면, “건륭(乾隆) 갑술(甲戌)년에 감사(監司) 김시찬(金時粲)이 만하루 6칸을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누정(樓亭)조에는 “만하루가 공산성의 동쪽 누대(壘臺)에 있으며”, 공해(公 廨 )조에는 “만하루가 여섯 칸(六聞)”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에서 만하루는 1754년(영조30)에 충청감사 김시찬(金時粲:1700~1767)에 의해 공산성의 동쪽 연못가에 6칸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공주판관 박사석(朴師錫)의 첫째 아들인 박윤원(朴胤源 :1734~1799)도 「만하루기(挽河樓記)」에서 관찰사 김시찬이 규흭(規劃)하여 만하루를 건립하였으며, 그 이름을 중국의 시성(詩聖) 두공부(杜工部)가 평화를 염원하며 지은 세병마(洗兵馬)라는시(詩)의 마지막 구에서 따왔다고 하였다.

▷ 만하루의 봄

만하루가 언제 훼철되었는지 그 이후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적어도 『日금』에 공청우도(公淸右道) 암행어사(暗行御史) 이언순(李彦淳)이 1822년 8월 24일 올린 서계에 의하면, 예전의 연못이 강바닥이 낮아져 제구실을 하지 못하니 시급하게 우물을 파야한다고 개진하면서 만하루에 대한 명칭을 언급하고 있다. 또한 1859년(철종10)에 편찬한『공산지』와 공산지를 거의 그대로 전사(傳寫)하여 1871년(고종8)에 편찬한『호서읍지』에 수록된 지도에 만하루가 표기되어 있어 적어도 이 시기까지 만하루가 존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공주시에서 제작. 설치한 안내판의 문구에도 ‘그간 홍수로 매몰되었다 만 기록되어잇는 정도이다.

 1980년 공산성내 유적조사를 하면서 만하루에 대한 건물지를 확인하였으며, 1984년에 정면3칸, 측면2칸의 목조건물로 복원하였다. 2006년 현재 보수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 만하루의 겨울

<관련 인물 및 성씨>
 충청감사 김시찬(金時粲):1700~1767)은 만하루를 건립하였는데, 본관 안동, 자 치명(穉明), 호 초천(苕川), 시호 충정(忠正)이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춘공 김상용(金尙容)의 현손(玄孫)이며, 좌랑을 역임한 김성도(金盛道)의 아들로 홍주에서 태어났다. 1751년 충청도 관찰사에 임명되었으며, 공산성 내에 우물이 없는 것을 염려하여 1754년에 연못을 만들고 그 주위에 만하루를 건립하였다. 1806년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초천집(苕川集)』이 있다.

▷ 공주 지도의 만하루 부근

한편 만하루의 건립취지, 누명(熡 名) 등 내력에 기록을 남긴 박윤원(朴胤源:1734~1799)은 본관 반남(潘南), 자 영숙(永叔), 호 근재(近齋)이다. 부친 박사석(朴師錫)이 공주 판관을 역임하는 동안(1769~1771) 공주에서 살면서 만하루기를 작성하였다. 그는 김원행과 김지행의 학통을 계승한 적전(嫡傳)으로, 다시 문하의 홍직필에게 전수하여 신응조, 임헌희, 조병덕 등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성리학의 중요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후에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근재집(近齎集)』과『근재예설(近齎禮設』이 있다.

박윤원의 동생인 박준원(1739~1807)은 자 평숙(平叔),호 금석(錦石),시호 충헌(忠獻)이다. 박준원 역시 부친을 따라 공주에 왔으며, 만하루의 건립취지, 누명 드에 대한 시를 한 수 남겼다. 그의 셋째 딸인 정조의 수빈(綏嬪)이 되었으며, 원자가 순조로 즉위하자 호조 판서.형조 판서. 공조 판서. 금위대장(禁衛大將)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금석직(錦石集)』이 있다.

박윤원의 동생인 박준원(1739~1807)은 자 평숙(平叔),호 금석(錦石),시호 충헌(忠獻)이다. 박준원 역시 부친을 따라 공주에 왔으며, 만하루의 건립취지, 누명 드에 대한 시를 한 수 남겼다. 그의 셋째 딸인 정조의 수빈(綏嬪)이 되었으며, 원자가 순조로 즉위하자 호조 판서.형조 판서. 공조 판서. 금위대장(禁衛大將)등을 역임하였다. 이후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금석직(錦石集)』이 있다.

 

▷ 일몰의 전경대

<기능 및 유적으로서의 가치>

만하루는 흐르는 금강과 함께 수려한 풍광이 한눈에 보이는 곳에 위치하지만, 공산성안의 동쪽 누대에 있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누정과는 달리 군사적 기능이 중심이 되었다고 보여진다. 이는 만하루라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즉 두보가 지은 세명마(洗명)라는 시의 마지막 구에서 ‘안득장사만천하 정세갑병장불룡(安得壯士만:어찌하면 장사를 얻어 은하수를 끌어다 갑옷과 무기를 깨끗이 씻어 영원히 쓰지 않게 할 수 있을까!)라고 하여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의 염원이 담겨있다.

<유적현황>

현재의 만하루는 정면3칸, 측면 2칸으 규모로 1984년에 복원되었다. 1980년도 발굴 당시 방형 주좌에 팔각의 고추형 초적을 둔 것으로 정면에 4매, 측면에 3매가 모두 원상으로 남아있다. 전체 추석 10매는 원형으로 남아있는데, 이 초석의 둘레에는 잘 다듬어진 돌로 지대석을 돌리고 있다. 정면의 초석간거리는 1.8m이다. 전체 규모는 정면10.5m에 측면은 6m로 장대석이 동쪽은 전면에 남아 있기도 하다.

글 민정희(충남역사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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