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세거 경주이씨는 ‘석탄가(石灘家)’와 ‘초려가(草廬家)’로 대표

공주시와 공주문화원이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우리조상 뿌리찾기 사업이 추진되는 가운데 첫 번째로 공주이씨에 이어 두 번째 ‘경주이씨’ 학술세미나가 지난 해 10월 25일 공주문화원 강당에서 공주유림(향교, 유도회), 경주이씨 문중 후손, 출향인 등을 대상으로 개최됐다.

▲ 숭의사 전경

공주의 조상 뿌리 찾기 사업은 공주를 탯줄로 하는 저명 성씨들의 고향 바로알기와 전통 찾기 사업으로 공주시의 유적과 계파 유적 중심, 유적 인물 자료 조사 성과 기대, 학술세미나 개최, 책자발간, 유적답사 추진 및 공주시 연계프로그램(고향 찾기, 자료 전시회, 사이버 시민 홍보)등을 목적으로 공주시가 역점을 두어 공주문화원에서 추진하는 사업이다.

이번 세미나를 하는 주목적은 서구화되고 핵가족화로 잊혀져가는 조상의 뿌리를 찾고 후손들에게 혈연의 중요성을 각인시키고 우리 조상을 알리는데 목적이 있다. 더 나아가서는 공주시에서 내고향 찾기 사업의 일환으로 고향방문을 유도하고, 공주시 역점추진사업인 5도 2천과 사이버시민 등과 연계해서 추진하는 뜻도 있다.

'남평문씨'는 학술세미나는 11월 17일, '진주유씨'는 학술세미나는 12월 19일에 실시된 바 있다. 본지는 공주이씨, 경주이씨에 이어 두 문중도 소개할 계획이다.

이날 학술세미나에서는 △이상익(영산대)교수의 ‘공주세거 경주이문(慶州李門)의 학문과 사상 개관’ △정경훈(충남대)박사의 ‘17세기 산림의 지성(知性)과 초려선생의 출처관(出處觀)’ △백원철(공주대)교수의 ‘성암(醒庵) 이철영(李喆榮)선생의 생애와 항일사적(抗日事跡)’에 관한 발표를 했다.

세미나 후 공주시 상왕동에 초려 고택 및 용문서원과 그리고 초려묘소(종촌)등의 유적 답사를 실시했다. 

공주 세거(世居) 경주이문(慶州李門)의 학문과 사상 고찰

 ‘공주 세거(世居) 경주이문(慶州李門)의 학문과 사상 고찰’ 주제를 통해 공주에 경주 이씨를 대표하는 가문으로 탄천면의 ‘석탄(石灘) 이재오(李存吾)’ 가문과 상왕동(중동)의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가문으로 대표된다.

○ 석탄 이재오(1341-1371, 고려 충혜왕 복위 후 2년 - 공민왕 20년)는 고려 말기의 문신으로서,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淸要職에 올랐으나, 요승 신돈의 횡포를 탄핵하고 울분 속에서 요절하였다. 석탄의 아들 래(來 1362-1416)는 신돈의 처형 직후 10세의 나이로 典客錄事에 특임되었다.

고려 조정에서는 뒤늦게 석탄의 충절을 깨닫고, 成均大司成을 追贈하고, 석탄의 어린 아들까지 특임한 것이다. 來는 이후 문과에 급제하여 공양왕 때 諫官을 역임하였고, 조선이 개국한 뒤로는 이방원(태종)을 도와 제2차 왕자의 난을 수습하여 계성군에 봉해졌으며, 사후에 태종의 廟庭에 배향되었다.

석탄의 손자 直生은 內贍寺 판관을 지내고 통훈대부에 올랐다. 석탄의 4세손 銀丸은 병조판서를 지냈다. 5세손 鏡은 정암 조광조의 문인으로, 忠佐衛 上護軍에 이르렀으나, 을묘사화 뒤에는 자취를 감추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6세손 大錫은 사헌부 掌令을 지냈고, 高潔한 학행으로 이름을 남겼다.

7세손 壽得은 울곡 이이의 문인으로, 忠佐衛 副護軍을 지냈고, 經史에 두루 통달하였다. 8세손 철(水+哲)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써 선조의 명예를 계승하기에 충분했으나, 임진왜란 뒤에는 은거하면서 경서를 궁구했다.

10세손 順鶴은 문사와 경제에 능하여 성균진사가 되었으나, 병자호란 뒤에는 울분을 품고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1세손 尙郁은 龍驤衛 副護軍을 지내고 嘉善大夫에 올랐으며, 12세손 希文은 龍驤衛 副護軍을 지냈다.

○ 초려 이유태(1607-1684, 조선 선조 40년 - 숙종 10년)는 고려 말기의 문신 월성부원군 菊堂 李蒨의 후예이다. 초려의 선조들은 대대로 서울에서 세거하다가 초려의 부친 월봉공 曙 때에 충남 금산으로 이주하였다.

초려는 금산에서 태어나 57세 때에 공주로 移居했거니와, 이후로 초려의 자손들은 公州에 세거하게 된 것이다. 초려의 장자 顒은 일등으로 생원시에 급제한 바 있으나, 32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학문을 대성하지는 못하였다.

초려의 손자 가운데 端誠은 학행으로 四山監役에 추천된 바 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端章은 문과에 급제하여 동부승지와 慶州府尹 등을 역임하면서 충직하다는 명성을 얻었다. 초려의 6세손 在元은 학행으로 누차 道薦을 받은 바 있다.

7세손 가운데 鏡은 효행과 금검으로 이름을 남겼고, ?는 문학에 탁월하여 선조 초려와 관계된 사실을 소상히 밝힌 '文山問答'을 남겼다.

9세손 가운데 晦榮은 範世警俗의 풍모를 보여주었고, 喆榮은 도학과 절의로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10세손 가운데 圭憲은 아우 圭卨과 함께 家學을 북돋고 강학에 힘써 수많은 門徒를 배출하였다.

17세기 孝宗·顯宗 재위 시기 산림으로 중요한 역할을 점유한 초려는 산림으로 戰後 조선의 재건을 위해 평생 동안 개혁의 염원을 <己亥封事>를 통해 실천적 의지를 나타냈다.

초려는 향촌에 은거하면서 궁핍한 생활을 영위했지만 士, 본모습을 잃지 않았다. 그는 독서를 학문과 실천으로 이어지는 시발점으로 인식하고 ‘삶(生)’과 같이 여기며 憂世와 樂天하며 항상 古人의 居敬窮理의 자세를 견지 하고자 하였다.

초려가 독서의 궁극적 목표는 窮理하여 居敬存心에 있다. 초려는 存心에 대해 배우는 사람이 자신을 수양하기 원한다면 반드시 안으로 그 마음을 바르게 해서 물질의 유혹에 당하지 않게 되는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런 이후에 마름이 태연해져 모든 사악함을 물리쳐 實德에 나갈 수 있다 주장하였다.

초려가 나가고자 하는 實德은 곧 그의 출처관과 연관이 있었다. 초려는 出仕의 명분을 청에 대한 復讐雪恥, 곧 북벌론에 두었고 그의 출처는 오로지 개인적 仕宦에 있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것이었다. 북벌대계는 초려에 있어 출처의 기준이요, 의의라 할 수 있었다.

초려는 북벌대계에 참여할 사람이 없어 자신의 출사 명분이 사라지고, 명분이 사라진 후 관직에 머무르는 것은 선비로써, 山林으로써 眞誠을 잃는 것과 다름없다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초려는 시대의 浮沈에 관계없이 그 실천을 강구하며 표리부동의 자세를 유지하였다.

초려가 장편의 <기해봉사>를 올리면서 지적한 일곱 가지 無實의 時弊論은 실천의 의지가 부족한 세태를 비판 한 것이다. 초려는 독서를 통해 眞誠을 회복하고 知와 實을 일치 시키고자 하는 강한 열망과 實質과 實行을 중시하는 실학적 면모를 보여 주고 있었다. 초려는 學의 이상향과 實의 행동적 면모를 함께 보여준 知行合一의 산림으로 17세기 지성인의 확고한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 성암(醒菴) 이철영(李喆榮)의 생애와 학술

성암 이철영은 고종 4년(1867) 공주군 계룡면 상왕리 중동골(횬 공주시 상왕동)에서 출생하였으며 공주 입향조인 초려 이유태의 9대손이다. 성암은 기울어져가는 국세와 일제의 침략에 우려하던 중 을사늑약에 분개하여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기유년(1909년)에 일제는 인민과 토지를 장악하려는 의도에서 민적법을 공포하였는데 성암은 일체 불응함은 물론 일제의 침략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서한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정부에 보내고자 하였다.

이로써 성암은 모두 세차례에 걸쳐 75일간을 헌병대 구치소에 갇혔으며 이때 민적편입을 강요당하고 신체적 위해를 입기도 했으나 끝까지 불응하였다. 특히 세차례에 걸친 투옥에서 옥중생활을 기록한 일기 등 4편의 일기를 남겼는데 「己酉日記(1909)」, 「庚戌日記(1910)」, 「甲寅日記(1914)」, 「戊午日記(1918)」, 이다. 

○ 현민(玄民) 이종선(李鍾宣 1928-2008)

중동골에 살고 있는 경주 이씨 중에서는 한학자인 故 현민(玄民) 이종선(李鍾宣 1928-2008)선생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현민 선생은 초려 이유태의 11세손이고 농포 이규설의 둘째 아들로 살아 생전에 전통적인 상투에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전통의상을 고수하였다. 공주향교의 전교와 충현서원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일제시기에는 단발과 징병을 피해 계룡산 속에 숨어 살며 눈속에서 자고 생식(生食)을 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러면서도 학문을 게을리하지 않아 인근에서 보기드문 한학의 경지를 지녔다.

생전에 그의 문하에서 한문을 공부하고 대학교수나 국학분야의 학자로 활동하는 사람이 수십명이 되며 지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까지 방학 때에는 한문을 공부하기 위해 찾아오는 대학생들이 줄을 이었고 용문서원 강당에서는 한학을 강독하는 낭낭한 소리가 들렸었다.

○용문서원(龍門書院)

공주시내에서 강변을 따라 공암·대전 방향으로 나 있는 구도로 약 4km 정도 가면 공주시 상왕동 입구에 이르게 된다.

이 도로에서 우측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300m 정도 가다가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나 있는 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세칭 중동골(中洞, 中湖), 선비골, 상투골, 한학마을이라 불리는 상왕3동이 나온다.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 1607~1684)를 제향한 용문서원(龍門書院)은 이 마을의 서북쪽 기슭에 동북방향으로 위치해 있다.

중동골은 원래 계룡산으로 올라가는 길목이라 하여 등룡촌(登龍村)이라 불리었는데 17세기에는 중동(中洞)이라 불리었고 19세기 전반기의 기록에는 중호(中湖)라는 명칭도 찾아 볼 수 있다. 마을의 위치가 왕천(왕촌천)과 금강이 만나는 위치에 있어서 여름 장마로 큰물이라도 내려가게 되면 마치 호수 한가운데 떠 있는 마을 같아서 중호라고 불린 것 같다고 한다.

중동골은 경주이씨의 동족마을로 모두가 한성받이이며, 현재는 12~13호가 거주하고 있지만 많았을 때에는 20~30 여 호에 달했다고 한다. 이 마을의 경주이씨 입향조는 17세기의 대표적인 산림으로 송준길(宋浚吉)·송시열(宋詩烈)·윤선거(尹宣擧)·유계(愈棨)와 함께 소위 충청오현(忠靑五賢)으로 일컬어지기도 하였던 초려 이유태로 그 후손들이 대대로 세거해 오면서 한학과 전통유학자의 면모를 계승해 오고 있다.

용문서원은 1986년에 새롭게 창설된 것이지만 사실 그 유서는 초려 이유태가 생전에 저술과 강학을 했던 용문서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공주에의 초려 이유태 서원제향은 당색과 관련된 미묘하고 복잡한 사정이 개재되어 있었다.

초려 이유태를 제향 한 서원은 그의 태생지인 금산에 있었다. 1684년에 이유태가 죽은 직후에 문인들에 의하여 건립된 반계서원(磻溪書院)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서원은 17~18세기 노론ㄱ하 소론 간에 당쟁이 심화되는 가운데 1713년(숙종 39) 일시 훼철되는 불운을 겪기도 하였다.

‘초려전집(草廬全集)’부록에는 일찍이 1694년(숙종 20)에 호남유생 이진환(李辰煥) 등이 반게서원의 사액을 청하는 소를 올렸으나 그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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